최근 뉴스를 보면 현 대표팀이
역대 최강이라는 기사가 자주 눈에 뜨이는데, 객관적인 관점으로 보나 저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보나 2002년 대표팀이 현 대표팀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황선홍, 안정환, 박지성, 이영표, 유상철, 이천수, 박지성, 유상철, 홍명보, 송종국, 김남일, 김태형, 최진철, 이을용, 이운재에 히딩크가 이끄는 대표팀이야 말로 역대 최강이 아닐지요.
 현 대표팀도 강한 팀이긴 하지만, 2002년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일본의 언론에서 한국팀을 역대최강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현 대표팀을 칭찬하는 말이지만, 어떻게 보면 한국의 2002년 4강 진출을 판정덕분에 올랐다는 식의 폄하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2002년 대표팀의 공격력과 수비력이 모두 현 대표팀을 앞선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 지는 독일과의 준결승 전날에 한국팀의 경기력을 극찬하면서 한국팀이 우승하기를 바란다는 제임스 로튼의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2002년 대표팀은 공격력이나 수비력이 대단히 뛰어난 팀으로 많은 축구 전문가들에게 평가를 받았는데, 결승전만 올랐다면 브라질을 이기고 천지를 진동키시는 아시아팀 월드컵 우승이라는 신화를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지난 일 이야기하면 뭐하냐는 분들이 있겠지만, 우리 나라 국민들조차 2002년 대표팀이 얼마나 강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1999년 한국팀은 브라질 팀을 1 : 0 으로 이겼었는데,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독일을 꺽고 결승전에 올랐다면 한국 1 : 0  우승의 신화를 창조했을 지도 모르지요.

 2002년 한국팀이 얼마나 강했는지 한국인들조차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황선홍 선수가 어린 선수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고요.
 황선홍 선수, 정말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불굴의 투지를 가진 선수라고 할까요?
 유럽의 강호 폴란드를 맞아 선제골을 터트리며 한국팀의 4강을 이끌었던 선수지요.
 안정환 선수의 이탈리아전 헤딩골은 월드컵 역사상 가장 극적인 골이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황선홍, 안정환, 설기현 등의 2002년 대표팀의 공격수들이 지금보다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02년 대표팀은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던 포르투칼, 이탈리아, 스페인을 연달아 꺽고 준결승에 진출하여 유럽 최강의 독일과의 준결승 경기에서 한 수 위의 경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우리나라가 1 : 0 으로 지기는 했지만, 유럽 최강이라는 독일팀을 능가하는 경기력을 보여주었지요. 러시아 출신으로 한국 대표팀의 감독을 맡은 적이 있는 비쇼베츠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한국팀이 독일팀보다 우세한 경기를 했지만 패했다며 안타까워 했다고 합니다. 

 한국이 준결승전에서 독일을 이겼다면, 홈관중의 열렬한 응원속에서 브라질을 꺽고 우승하여 천지를 개벽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지요. 
 
독일전의 패전은 홈팀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석연치 않은 판정이 있었고 그 결과 패했는데, 패자는 말이 없다는 말이 있지만, 생각할수록 아쉬웠던 경기였습니다.
 
2002년 대표팀이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에서 경기를 했다고 해도 그때의 실력이라면 4강 진출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월드컵 4강 신화를 기록하고도 단지 홈구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실력도 없는데 편파 판정으로 4강에 올라간 것처럼 생각하는 외국인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2010년 대표팀이 사상 최고라는 말은 우리 자신조차 2002년 대표팀의 진정한 실력을 모르는 것이 아닐지요.

 2002년 대표팀은 준결승에서 두차례의 연장전으로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독일과 경기에서 선전했지만, 후반들어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져 수비에 허점을 보여 골을 허용한 것 같습니다.
 비쇼베츠의 평가처럼 한국팀이 우세한 경기를 하고도 패했지만, 패인은 이탈리아, 스페인, 두경기 연속 피말리는 접전으로 체력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닐지요.

 6월 18일 이탈리아, 6월 22일 스페인과 연거푸 연장혈투를 벌인 한국은 불과 3일 후인 6월 25일에 6월 21일 미국을 1 : 0으로 이기고 4일간의 휴식을 치룬 독일과 준결승전을 치루었기 때문에 체력면에서 훨씬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상대로 팽팽한 접접을 벌였다는 사실을 보면 만약 독일을 꺽고 5일 후인 6월 30일 브라질과 결승전을 치루었다면 세계 최강 브라질을 이길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지요.


 2002년 한국 대표팀, 정말 강했습니다.
 현 대표팀도 강하지만, 2002년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히딩크 감독의 리더쉽과 선수들의 헝그리 정신, 모두 초인적인 힘이었지만, 현 대표팀은 아직 그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전에 2002년 대표팀 주장이었던 홍명보 청소년 대표팀 감독이 인터뷰에서 현 대표팀이 2002년 보다 강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사를 보았는데, 겸손한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제가 현역이었던 2002년 대표팀이 더 강했습니다."라고 말할까요?
 질문 자체가 우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로서 후배들의 기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2002년 대표팀이 현 대표팀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에 현 대표팀의 경기 내용에 대해 혹평한 히딩크 감독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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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어디서 봤어?"
 
SBS의 월드컵 독점중계로 월드컵 독점중계에 대한 네티즌들의 불만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한국팀의 월드컵 첫경기 쾌승으로 16강 진출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SBS를 집에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 큰 문제가 되고 있지요.
 저는 서울에 살아서 SBS의 독점중계에 대한 불편함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지만, SBS가 서울방송인 관계로 SBS 방송을 집에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월드컵을 보기 위해서 어디론가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한달이면 끝날 월드컵 때문에 SBS가 나오는 유료방송을 신청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지요. 

 SBS의 방송허가를 취소해야 된다는 분들도 있더군요. 
 그러한 일이 생길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만, 민심은 SBS 방송에 호의적이지 않아 독점중계의 폐해가 계속 된다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을 것 같습니다.
 SBS가 월드컵 중계를 독점하기 위해서 국력이 낭비되고, 많은 국민들이 불편하게 된다면 SBS 방송의 방송허가를 취소해야 된다는 여론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에서 SBS의 방송허가를 취소할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만, 독점 방송의 폐해가 계속되고 이로 인하여 방송국들의 출혈경쟁이 치열해진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SBS방송이 2016년까지 월드컵과 올림픽 중계권을 따냈다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국민의 볼권리를 침해한다면 SBS의 주요스포츠 독점중계가 끝나는 2016년이 되기 전에 방송허가를 취소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지 않을지요. 

 방송국은 민영방송국이라고 해도 사회적인 발전을 위해 정부의 허가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책임감이 있습니다.
 상업 방송국이니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으로 방송을 한다면 안되겠지요.
 SBS, 지방에는 나오지도 않으면서 앞으로도 지금처럼 주요 스포츠 경기를 독점 중계를 한다면, 국민들에게 미운 털이 박해 월드컵이 끝난 후에 시청률이 크게 떨어져 서울방송이 아니라 스포츠 방송으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SBS가 월드컵으로 1000억 이상을 번다고 해도 독점중계로 인한 폐해로 국민들의 민심을 잃는다면, 시청률이 떨어져 결국에는 자승자박이 되지 않을지요. 
 이번 월드컵 대회에서 한국팀이 4강을 진출하여 SBS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익을 올렸다고 해도 향후 드라마를 비롯한 시청률이 떨어진다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SBS방송이 스포츠 전문 방송국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앞으로도 올림픽이나 월드컵같은 주요 스포츠 대회를 독점 중계하여 큰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최근 뉴스를 보니 방송국의 독점 방송을 막는 방송법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합니다.
 국민들이 이 법안을 지지할 것이기 때문에 SBS의 월드컵 독점중계가 2014년에는 힘들 것 같습니다.
 SBS 월드컵 독점중계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크기 때문에 결국은 정부가 SBS 독점중계에 개입하지 않을지요.
 정부가 개입하여 향후 SBS의 독점중계를 막는다면, SBS는 결국 국민들의 민심만 잃고, 타방송국의 미운 털이 박혀 이번의 월드컵 독점중계로 1000억 이상의 돈을 번다고 해도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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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를 정복한 영웅이

 바로 우리의 선조라는 사실을 아는가!” 
 
-신재하의 역사소설 '배달민족 치우천황' 중에서-


 신재하 작가님의 '배달민족 치우천황' 연재는 신재하 작가님 블로그에서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요기를 클릭하면 신재하 작가님의 블로그로 이동 →
신재하 작가님 블로그
 


 붉은 악마의 캐릭터인 치우천황이 소설로 다음뷰의 구독자들에게 다가왔습니다.
 신재하 작가님의 '배달민족 치우천황'이 다음뷰 창작 부분에서 연재 중인데,  현재까지 10회까지 연재했고, 주 1회씩 정기적으로 발행 중입니다.
 개인적으로 역사소설을 좋아하여 1회에서 10회까지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제 막 주인공 치우(치우천황)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독자들에게 호기심을 주고 있으니 치우천황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제 블로그에서는 치우천황에 대한 저의 생각과 신재하 작가님의 소설 '배달민족 치우천황'의 일부분을 작가님의 허락을 받고 포스팅하였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밑의 링크를 통해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치우천황,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 (조정우)


 붉은 악마의 캐린터인 '치우천황'이 우리 선조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최근들어 붉은 악마의 캐릭터인 '치우천황'이 네티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지만, 아직도 치우천황이 우리 민족의 선조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분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듯이 그 누가 아무리 치우천황을 자신의 선조라고 억지를 부린다고 할지라도 치우천황은 우리 선조가 맞습니다.
 치우천황은 우리의 선조인 단군의 선조시니까요.
 요즘 말로 하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라 할까요? 


 치우천황은 중국 최초의 황제(천자)로 인정받은 황제 헌원과 동시대로 사마천의 사기에는 헌원이 치우천황을 죽였다고 나오지만, 우리나라 문헌에는 치우천황이 이겼다고 되어있어 사기의 내용이 정확한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치우천황이 중국에서 전쟁의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한나라 유방이 초나라 항우와의 전투에 임하기 전에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헌원이 정말 치우천황을 이겼다면, 유방이 헌원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았을까요?
 사기의 기록대로 치우천황이 헌원에게 죽었다면 유방이 치우천황이 아닌 헌원에게 제사를 드렸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50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러 증명하기 쉽지 않겠지만, 아무튼 치우천황은 중국인들을 떨게 만들었던 전설적인 전쟁의 영웅인 것이 사실입니다.
 치우천황은 70전 무패를 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치우천황이 얼마나 대단한 영웅인지 알 수 있지요.
 안타까운 일은 위대한 민족의 선조 치우천황의 존재를 믿지 않는 한국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역사학자들 중에는 치우천황을 믿지 않는 분들이 많아 아직도 국사책에 치우천황이 등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청나라가 은나라나 하나라, 황제에서 요순임금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실존역사로 인정받고 있는 것처럼 치우천황도 언젠가는 우리의 선조라는 사실이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소설 '배달민족 치우천황'에 대해서> 

 신재하 작가님의 "배달민족 치우천황"이 다음뷰에서 연재를 시작했는데, 신재하 작가님은 치우천황 집필을 위해서 수년간 치우천황에 대한 역사자료를 조사한 후에 집필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최근들어 사극이 역사에 근거하지 않아 사극인지 환타지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비해 신재하 작가님의 '치우천황'은 역사자료에 근거한 역사소설입니다.



<작가의 말>


중국 정사와 우리 사서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 단군왕검 이전의 실존 기록이
치우천황의 역사이다. B.C 2700년 경, 북방 바이칼 호수에서 남방 파미르 고원과 중국 양쯔강을 지나 중국 해안까지, 동으로는 만주와 백두산 지역은 물론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서로는 몽고 전체를 아우르는, 전 세계의 가장 큰 영토를 지배했던 우리 배달민족의 실존 역사인 것이다.

                                         - 배달민족 치우천황 제 1화 중에서 -

 

근거 사료 : 중국의 <사기> <산해경> <한서지리지>, 

              우리 역사서 <한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 외 다수. 

              기타 치웅천황의 묘소를 비롯하여 배달한국이 일궈낸 세계적 문화

              유산 '홍산문화'에서 수많은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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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민족 치우천황을 집필하며> - 신재하

중국 정사와 우리 사서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단군왕검 이전의 실존 기록이 치우천황의 역사이다. B.C 2,000년 경, 북방 바이칼 호수에서 남방 파미르 고원과 중국 양쯔강을 지나 중국 해안까지, 동으로는 만주와 백두산 지역은 물론 태평양에 이르기 까지, 서로는 몽고 전체를 아우르는, 전 세계의 가장 큰 영토를 지배했던 우리 배달민족의 실존 역사인 것이다.

 일제 시대로부터 명맥이 이어진 우리 나라의 보수 사학계는 서기 전 2333년의 단군왕검을 한낱 신화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에 단군왕검을 현존했던 역사적 사실로 보는 진보 사학계 및 재야 사학계와의 논쟁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단군왕검 보다 약 400여 년 앞서있는 치우천황의 분명한 발자취가 명백밝혀짐으로써 우리 민족의 역사가 최소한 반 만년이 훨씬 넘는 역사라는 것이 확연히 증명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우리 한민족의 시원은 놀랍게도 B.C 7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인 한국이 다 수의 한님들에 의해 3301년 간 지속되었다. 이어 한국 말기에 한님의 아들 중 한 사람인 한웅이 3천의 무리를 이끌고 동진하여 아사달에 신시 배달 한국 (B.C 3898 ~ B.C 2333)을 세우면서 우리 배달민족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 뒤를 단군조선이 계승하고 있음을 중국과 우리 나라의 많은 역사서들의 기록에서 입증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그들 최초의 황제로 추앙되고 있는 헌원황제의 기록들이 실재 역사의 사건임을 공식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 헌원황제가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우리 배달민족의 황제가 치우천황인 것이다.

 

 

 <치우천황의 역사적 기록>

한 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효가 있었고 동쪽에 창힐이 있었으며, 서쪽엔 황제 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로 승리를 차지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 헌원은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 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 되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찍이 치우천황으로부터 간지의 술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의 글을 배웠다. 당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 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 삼성기

 

 

치우는 14대 자오지 한웅으로 배달나라를 일으켜 중국의 희대 지방을 점령하고 탁록의 들에서 헌원을 사로 잡아 신하로 삼았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

                                                                   -     한단고기

 

 

당초 세계는 동서로 갈리어 야만적인 수인, 즉 한족이 살고 동에는 한웅이 다스리는 문명인, 즉 우리 동이족이 살았다. 처음에는 서로 떨어져 살다 뒤에 인구가 늘어나 국경을 접하게 되자 싸움이 붙었다. 이것이 치우천황과 황제의 싸움인데, 이 싸움에서 치우가 이겨 먼저 제위에 올랐다. 이때 한족들은 투구와 갑옷을 만들 줄 몰랐다. 그래서 갑옷을 입은 치우를 머리가 구리요, 이마가 쇠, 즉 동두철액이라고 했다. 10년 동안 73회나 싸웠는데 장수들은 모두 피로한 줄 모르고 사병 또한 후퇴할 줄 몰랐다.

     

                                                                   -     규원사화

 

 

치우는 노산의 쇠로써 오병을 만들었다. 그런데 치우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중략)  황제가 섭정을 할 때 치우와 그 형제 81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였다. 구리 머리에 소의 이마를 가졌고 모래와 돌을 먹었다. 병장기로 칼, , 큰 활 등을 만들어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  중국의 <사기> - 

 

사기의 내용은 의도적으로 치우천황을 깍아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짐승의 몸에 모래와 돌을 먹었다니. 사마천은 왜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그 까닭은 치우가 자신들의 최초의 황제로 떠 받들고 있는 헌원황제를 굴복시킨, 다름 아닌 동이겨레 즉 우리 배달민족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치우천황의 역사는 우리 겨레의 역사이며 영광된 역사이다. 우리 민족은 역사상 가장 큰 땅덩이를 호령하였던 치우천황의 후손들이다. 그동안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짓눌려 있던 고려와 조선시대, 그리고 일본의 36년 간 압제 속에서 우리 민족은 처절한 패배의식과 왜곡된 반도사관의 주입식 역사교육을 강요당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그 잔재가 뿌리깊게 박혀 있다는 것이며, 이는 통탄할 노릇이다.

  나는 십 수 년 전, 한참 방영되던 TV CF의 한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CF 내용 중에 사회에 갓 진출한 한 젊은이가 내뱉는 독백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난 우리나라가 단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공해 본 적이 없다는 역사를 가졌다는 게 싫었다.

CF를 볼 때마다 우린 왜 이렇게 작고 힘없는 민족으로 태어났나하는 자괴감에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어서 왠지 우울했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줄 알았으니까. 다른 나라를 침공했다는 게 자랑스럽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의 침략에 시달려오기만 했던 나약한 약소국이라는 사실이 슬펐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 시대 때 우리의 역사서를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다른 나라의 지배에만 익숙해져 있는 짧은 역사의 민족으로 개조시키고자 한 일본의 우리 역사 말살정책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혀 엉뚱하게도 2002년 월드컵을 통해 묻혀질 것만 같았던 우리 민족의 위대한 웅혼은 다시 살아났다. 우리 나라 국가대표 축구선수라는 붉은 전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들의 영혼과 함께 하는 12번 째 붉은 전사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붉은 악마'다. 붉은 악마의 공식캐릭터로만 알려진, 일명 도깨비상이 바로 '치우천황'상이다. 옛부터 중국과 몽고 지역에 <전쟁의 신>,<승리의 신>으로 널리 알려져 지금까지도 곳곳에 사당이 지어져 숭배되고 있으며, '난중일기'에도 이순신 장군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 치우천황께 제를 올렸다는 기록                                                  

 

B.C 2706년 온 세상 하늘 높이 떠오른 위대한 별 하나가 오늘 A.D 2010, 또 다시 그 웅혼한 기상을 내 뿜으며 찬란히 빛을 발한다 그 이름은 치우다.

  치우는 세계를 호령했던 고대사의 주인공답게 우리 배달민족의 영혼 속에 살아 숨쉬며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의 배달민족이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세계를 향해 포효하는 붉은 악마로, 인류문화를 선도하는 문화 선진국으로, 혼란한 세계질서를 바로 잡고 주도하는 초일류 강대국으로 거듭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배달의 젊은이들이여 눈을 떠라!

배달민족 치우천황의 직계 후손들이여, 이제 긴 잠에서 깨어나라!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배달민족의 웅대한 꿈을 온 누리에 마음껏 펼쳐 보이자.



 

 <1화>

 

 

중국 토착민의 황제인 헌원은 자신의 군세가 세 배 이상 많다는 것을 믿고 자신감이 충만했다.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열망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자신이 대군이 전속력으로 진격하자 천황군은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천황군이라 하더라도 전면전에서 대군을 당해낼 수는 없으리라. 그렇게 반나절을 쫓고 쫓기는 양상으로 전투는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도망가던 천황군이 안개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 안개가 너무 짙어 이상한 생각이 든 헌원은 추격을 멈추고 형세를 관망하기에 이르렀다. 안개 만이 아니였다. 붉은 염초와 유황을 피워 올린 연기가 안개와 하나가 되어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내뿜었다. 헌원군은 왠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 동안 적막이 흘렀다.

둥둥둥둥둥둥둥 두둥 두둥

갑자기 요란한 북소리, 함성소리와 함께 천황군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양 옆 쪽에서도 천황군이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천황기를 높이 쳐들고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비록 수 천 기에 불과한 소수 병력이었으나 헌원군의 혼란과 공포를 조성하기에는 충분했다. 헌원은 잠시 당황했으나 천황군을 다 합쳐봐야 자신의 군대의 반에도 훨씬 못미치는 숫자임을 간파하자 맞서기로 하고 총공세를 명령했다. 그러나 군사들이 사기는 이미 꺾여 있었다. 기분 나쁠 정도의 짙은 안개와 붉은 염초의 연기 장막 속에서 들려오는 천황군의 북소리. 곧 이어 붉은 빛 갑옷을 입은 천황군이 우뢰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진격해오자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대군이 전면전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지만 안개와 염초 연기가 헌원군의 혼백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제대로 된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헌원군은 혼란의 빛이 역력했다. 그동안 치우천황이 모래를 먹고 안개를 일으키고 천둥벼락을 내려칠 수 있다는 소문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파죽지세로 몰아 친 천황군과 뒤엉키자 마자 헌원군은 일시에 아비규환에 빠지고 말았다.

둥둥둥둥둥둥둥 두둥 둥둥둥둥 두둥 두둥

 

 

아침 6, 요란한 알람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다. 꿈 속에서 치우천황을 보다니.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진다. 새벽 3까지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든 후 깨었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다. 오늘, 잠실벌에서 벌어질 국가대표 응원단 붉은 악마의 첫 공식 경기 데뷔를 앞두고 벌써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우리의 국대와 세계 최강의 브라질 국가대표와의 최초의 국가대항전! 히바우드, 카푸, 아모로주 등 세계적인 축구스타와의 만남 자체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스멀스멀 쏟구치는 게 느껴진다. 작년 초 붉은 악마 동호회에 가입했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로서는 응원연습에 제대로 참여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어엿한 대학생 청년이 된 나는 다르다. 응원도 대부분 다 익혔고, 본격적인 붉은 악마의 공식 출범식이 오늘 대한민국 잠실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세계 최강 브라질을 상대로

일어나자 마자 세수부터 한 나는 정성스레 얼굴에 페인팅을 하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사생대회에 곧잘 입상했을 정도의 그림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는지 꽤 근사한 태극문양이 왼쪽 뺨에 그려진다. 벌써 몇 번 해본 터라 혼자서 그리는 솜씨에 스스로 감탄사가 배어 나온다. 거울에 비친 벌거벗은 나의 몸을 유심히 바라본다. 상체의 앞부분 전체에 그려진 붉은 악마의 공식 캐릭터인 도깨비상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도깨비가 아니라 치우천황 상이다. 지난 밤 두 시간에 걸쳐서 정성 들여 페인팅을 하고서야 난 잠자리에 들었다. 치우천황을 내 몸에 품고서 잠이 든 셈이다. 왠지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생생한 간 밤의 전투가 의미있게 다가온다. 우리에게 새로운 기와 영혼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 때까지 우리 나라 국대의 실력이란 객관적으로 브라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브라질은  월드컵 4회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의 팀이고, 우리는 지금껏 월드컵에 나가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나라였으니 우리의 승리를 예견하는 사람은 없었다.

히바우두가 이끄는 초호화군단 브라질의 초청경기라 시합 전부터 전세계 매스컴이 집중되었고, 또 세계적으로 생중계 되기에 더욱 긴장되었다. 하지만 왠지 자신감이 들었다. 우리의 국대 선수들은 이미 예전의 그들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웅혼한 기상이 넘쳐나고, 주체할 수 없는 붉은 악마의 투지와 자신감이 쏟구치고 있음을 느꼈다면 단지 응원단으로서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을까.

1999 3 31 오늘은 우리 나라 축구 역사상 새로운 전기를 맞는 날이 될 것이다.

나는 우리의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로운 응원단 붉은 악마로서 비장한 결의를 마음 속에 다지며 집을 나섰다.

 

 

(계 속) 

 


치우천황 2화 ~ 10화는 신재하 작가님 블로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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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한국팀의 승리 이후에 뉴스를 보니 히딩크의 혹평에 대한 기사가 눈에 띄였습니다. 이기긴 했지만, 아쉬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지요. 
 스코어상으로는 2 : 0의 완벽한 승리였지만, 경기 내용은 여러차례 결정적인 위기를 허용할 정도로 그렇게 좋아 보이지 못했습니다.
 정성룡 골키퍼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2 : 1로 불안하게 승리를 지켰을 가능성이 높은 경기였던 것 같습니다.
 역대 최강이라는 일부 언론의 평가와는 달리 2002년 월드컵 때 철벽수비를 자랑했던 한국팀에 비해 수비에 허점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에 뛰어난 골게터가 있었다면 위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스전에서 비록 이겼지만, 나이지리아와 아르헨티나는 그리스보다 강하기 때문에 그리스전에 나타났던 수비의 허점을 보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팀이 그리스전에서 정말로 멋진 경기를 보여주며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지만, 그리스전에서 드러난 수비의 문제점을 보완하지 않는다면 나이지리아와 아르헨티나와 숨가뿐 2위 다툼에 밀릴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2차전에서 그리스가 나이지리아를 이기거나 비긴다면 정말 좋겠지만, 나이지리아가 그리스를 3점이상 차이로 대파한다면, 1차전을 기분 좋게 이기고도 스위스에 패하여16강에 진출하지 못한 지난 2006년처럼 될 수도 있겠지요.
 현재의 한국팀의 상승세로 보았을 때는 한국팀의 16강 진출은 무난 할 것으로 보이지만,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2차전이 가장 어려운 상대라는 아르헨티나라는 것입니다.
 만약 나이지리아가 그리스에 대승하고 한국이 아르헨티나에게 패한다면 아르헨티나의 16강 진출이 확정되면서 4년전처럼 마지막 경기를 배수진과 같은 치열한 경기를 치루게 될 수 있겠지요.
 한국이 아르헨티나마저 이겨 일찍 16강을 확정지은 후에 체력을 비축하여 16강 경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지요.
 현재의 한국팀의 공격력으로 봐서는 수비의 허점만 보강한다면, 아르헨티나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한국팀에 바라는 것은 16강 진출이 아니라 다시 한번 4강이나 8강에 진출하여 2002년의 4강 진출이 운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국민들의 염원이 아닐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2002년 보여주었던 철벽수비를 다시 찾아야 되지 않을지요.
 정성룡 골키퍼가 선방했지만,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으니 골키퍼의 선방에 의존하기 보다는 철벽수비로 상대팀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최상책일 것입니다. 
 허정무 감독께서도 경기 후에 수비에 대한 보안책을 세우시겠지만, 선수들도 무엇이 문제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팀이 4강이나 8강에 진출하려면, 나이지리아와 아르헨티나를 누르고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해야 유리할 것입니다. 
 그리스가 비록 우리팀에게 지기는 했지만, 2004년 유로 선수권 대회 우승팀인 만큼 저력이 있어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에는 선전하여 비기거나 심지어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를 2 : 0으로 이긴 한국팀이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여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할 수도 있겠지요. 

 한국팀의 선전을 기대해 봅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께서 한국팀의 플레이에 대해 좋지 못한 평가를 내린 것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될 것입니다.
 일부 언론의 역대 최강이라는 평가가 현실화되려면, 그리스전에서 드러난 수비의 허점을 보완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 글 : 병법 36계 위위구조를 연애에 응용하는 방법 
          : 미녀와 야수같은 커플이 오래가기 힘든 이유
 (다음 블로그)
          : SBS 독점중계,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이유
          : 테마주 투자, 수익률이 높은 만큼 위험도 크다
          : 붉은 악마 캐릭터, 치우천황 리뷰 (신재하 소설)
          : 개구장이 소년의 첫사랑 제3화 (오늘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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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쿠산티페, 모짜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와 함께 세계 3대 악처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소피아는 착한 여자였습니다.
 
18세의 나이로 34세의 톨스토이와 결혼한 그녀는 남편이 문학 역사상 최고의 걸작이 탄생하도록 내조했었지요.
 물론 소피아가 악처라는 말을 들은 것은 잘못한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소피아 또한 톨스토이가 세상을 떠난 후에 자신이 잘못한 점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는 악처라기 보다는 남편과 갈등하는 과정에서 악처처럼 보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톨스토이가 비교적 젊은 시절에 쓴 책에는 소피아를 착한 아내라고 표현했는데, 왜 착한 아내 소피아가 악처처럼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전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이야기로 유명하지만 아마도 이러한 톨스토이의 재산 문제가 아내와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톨스토이의 아내가 악처가 된 것으로 원인 중에 하나가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녀가 악처가 된 이유가 꼭 재산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자는 남편의 사랑이 식으면 상처받고 감성이 둔해져 재산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으니 어쩌면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가 악처가 된 진짜 이유는 톨스토이의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 아닐지요.
 소설을 보면 착한 여자가 남편의 사랑을 잃은 후에 재산에 집착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여자는 남편의 사랑이 식으면 재산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지요.
 제 주변의 여성들 중에도 결혼하기 전에는 사랑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어도 결혼한 후에 남편의 사랑이 식은 후에는 명예나 재산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은데, 톨스토이의 아내도 남편의 식은 사랑으로 변한 것이 아닐지요.
 여자는 사랑에서 행복을 찾는 경향이 있는데, 사랑받지 못하면 마음이 황폐해지고 감성이 둔감해져 착한 여자에게 비지니스 우먼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19세기에는 여자에게 사회적인 진출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톨스토이의 아내는 마음속에 불만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자신의 재산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소피아는 남편 톨스토이의 결정을 순순히 따르기 어려웠겠지요.

 남편의 뜨거운 사랑을 받다가 갑자기 남편의 사랑이 식으면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 카레니나처럼 다른 여자처럼 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여자는 처녀시절에는 만인의 연인이 될 수 있어도 결혼하면 남편의 사랑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방황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톨스토이의 아내도 남편의 식어버린 사랑에 대한 좌절감으로 인해 악처가 된 것이 아닐지요.

 한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톨스토이의 걸작 '전쟁과 평화'의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나타샤는 그의 아내 소피아가 모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피아는 나타샤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멋진 여성이 남편의 식어버린 사랑과 재산 문제에 대한 갈등으로 악처가 된 경우는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만이 아니지요. 


 톨스토이의 경우 아내와 그토록 심한 갈등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제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좀 더 아내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는 없었는지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군요.
 여자의 마음은 항상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항상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고, 사랑을 통해서 존재감을 얻는 여자의 마음은 같다는 것이지요. 
 둘 사이에 좀 더 대화와 이해가 있었다면, 톨스토이도 소피아도 행복한 말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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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단독중계로 SBS가 벌어들일 돈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국민적인 스포츠인 월드컵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소탐대실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업이 정당한 방법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제는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야 성장할 수 있는 방송국이 명분없는 월드컵 단독중계로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SBS는 지역 민방이기 때문에 전국민이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독 중계를 고집하여 월드컵을 보기 위해 케이블이나 위성방송에 가입해야 하는 불편함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향후 KBS와 MBC와의 법정 싸움을 통해서 두 방송국의 공공의 적이 된다면 과연 얼마나 덕이 될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향후 국제적인 스포츠 중계에서 KBS와 MBC의 협력이 기대되는 반면에 SBS는 왕따를 당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혼자서 둘을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군요.
 최근 월드컵 관련 뉴스를 보면 SBS에서 MBC와 KBS와의 월드컵 중계 협상에서 한국 경기를 단독중계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요구조건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방송국이 월드컵을 중계하려는 것은 한국 경기를 중계하고자 함인데, 한국경기를 독점 중계하겠다니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협상을 한 셈이지요.
 월드컵은 일회성 이벤트라서 수백억을 번다고 해도 국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잃는다면, 장기적으로는 득보다 실이 클 것입니다.
 2014년 월드컵 경기 중계권까지 획득했다고 해도 다음부터는 어떻게 될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SBS가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얼마를 벌지 모르겠지만, 수백억을 번다고 해도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 소탐대실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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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법 36계는 저자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병법 36계는 모두 손자병법에 나오는 이론이기 때문에 손자병법 36계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위위구조는 병법 36계 중 제2계인데,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의 후손인 제나라의 명장 손빈이 위나라의 명장 방연을 이긴 이 작전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제나라의 명장 손빈은 위나라의 공격으로 조나라의 수도가 포위되어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을 때 조나라에 대한 총공격으로 위나라의 수도가 빈틈을 타서 공격해서 이겼는데, 강한 적군의 강점을 피해 돌아서 헛점을 노려 공격하여 이긴 것이지요.

 손빈은 조나라가 위나라의 명장 방연의 공격으로 수도가 포위되어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조나라에 대한 총공격으로 위나라의 수도가 빈 틈을 타서 공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손빈은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위나라의 공격으로 한시가 급한 조나라의 수도로 가지 않고 방비가 허술했던 위나라의 수도를 공격하여 위나라의 군대를 본국으로 퇴각하게 만들었고 갑작스러운 퇴각으로 지친 위나라의 대군을 대파하였던 것이지요.

 전쟁이 벌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위나라의 명장 방연이 대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여 조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다급해진 조나라는 제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제나라의 명장 손빈은 위나라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주력군대의 이동으로 방비가 허술해진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공격하여 위나라의 대군이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지요.

 조나라와의 전쟁으로 지친 위나라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퇴각으로 더욱 지치게 되었지만 제나라의 병사들은 처음부터 위나라로 향했기 때문에 유리한 상태에서 위나라와 싸울 수 있었고 그 결과 제나라는 위나라에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위위구조의 전술은 서양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를 위협하고 있을 때, 로마의 명장 스피키오가 한니발의 조국인 카르타고를 공격하여 한니발이 로마를 떠나게 만든 것도 위위구조의 전략과 비슷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카르타고의 위치는 지금의 아프리카의 튀니지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이 로마에서 카르타고로 그토록 먼 길을 이동하였으니 카르타고에 도착했을 때는 상당히 지친 상태가 되었겠지요.
 오랜 이동으로 지치고 퇴각으로 사기가 떨어진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에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이처럼 위위구조의 작전은 강한 적의 예봉을 피해 허점을 찔러 적의 기세를 꺽고, 적을 지치게 만들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상태에서 싸우는 작전이지요.


 위위구조는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 중에 하나인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아무리 급해도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는 정도를 지키라는 뜻인데, 쉽게 말하면 아무리 급해도 침착하게 적의 헛점을 찔러 공격하라는 뜻입니다
 위나라의 군대는 강하여 제나라가 정면으로 공격했다면 패할 수도 있었지만, 우회하여 적의 수도를 공격하니 대승할 수 있었지요.

 위위구조의 고사를 만든 손빈은 당시에 대장군 전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엉긴 실타래를 풀려면 쳐서는 안되듯이 적(위나라)을 이기려면 급소(위나라 수도)인 목을 잡고 허를 찌르면 적의 형세가 불리해져 (조나라에 대한 포위는) 저절로 풀리게 될 것입니다."
 손빈의 작전대로 위나라의 수도를 공격하자 위나라의 명장 방연은 아쉬움을 머금고 퇴각을 결정합니다.
 사기도 떨어지고 지친 위나라는 제나라에 크게 패했지요.
 만약 손빈이 위나라의 수도를 공격하지 않고 조나라의 수도를 구원하러 갔다면 승패를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물론 손빈이 워낙에 명장이라 이길 수도 있었겠지만, 손빈은 모험을 하지 않고 확실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지요.

 위위구조라는 말은 급하다고 서두르지 말고 적의 급소를 노려 공격하라는 말입니다.
 강한 적을 이기려면 정면승부로는 어렵고 적의 약점을 찔러야만 이길 수 있지요.
 아무리 급해도 계란으로 바위를 쳐봤자 박살나는 쪽은 계란입니다.
 바위를 치려면 바위를 칠 수 있을 정도의 단단한 물건을 가져와야 되겠지요.
 가끔 제 주변을 보면 주식투자하다가 손실을 보면 한꺼번에 만회하기 위해 태마주를 사서 오히려 더 큰 손실을 보는 분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필요한 전략이 손빈의 위위구조가 아닐지요.
 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급한 마음에 빨리 고백한다고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성만 막아 버리는 경우가 많지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위위구조'는 아무리 급해도 목표를 이루는데는 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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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지스의 First of May 는 5월 1일이 되면 항상 생각이 나는 노래지만, 실제로 First of May 는 5월 1일이라는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영화 'Melody'에 나오는 이 음악은 비지스가 1970년에 부른 노래인데, First of May의 뜻은 5월 1일이 아니라 영국식 영어로 어린 나이의 첫사랑, 즉 풋사랑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인터넷을 보면 5월 1일로 번역된 것을 볼 수 있지만, 오류일 것입니다.
 First of May는 영국식 표현이기 때문에 영국식 영어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생긴 오류가 아닐까 싶네요.
 실제로 제가 아는 미국 친구에게 물어 보니 잘 모르겠다고 하는 반면에 영국인 친구에게 물어 보니 맞다고 하더군요.
 영국식 영어로 미국인들은 잘 모르는 표현이라고 하니, 지나가는 미국인한테 사실인지 물어봐도 모르는 경우가 많겠지요.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는 영화보다 영화음악으로 유명한데, 비지스가 부른 First of May, To love somebody, Melody Fair 등은 아직까지도 올드 팝송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요. 
 예전에 이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뮤지컬 영화 '올리버'로 유명해진 마크 레스터가 주인공 다니엘, 잭 와일드가 친구로 나오고, 여주인공 멜로디 역에는 트레시 하이드라는 귀엽고 예쁜 소녀가 나오는데, 영화를 봐도 음악을 들어도 5월 1일에 관한 이야기는 볼 수 없더군요.
 주인공 다니엘과 멜로디의 풋사랑을 노래한 것이 First of May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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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4대 미녀 중에 하나인 초선과 삼국지의 관우의 사랑 이야기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시대 최고의 미녀 초선과 삼국시대 최고의 영웅 관우의 사랑 이야기는 일관성없이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시나 소설, 사서 같은 문헌으로 기록된 것이 없기 때문에 허구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요.
 만약 사실이라면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에서 관우와 초선의 사랑 이야기를 쓰지 않았을지요.
 시인이나 역사학자도 초선과 관우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서 쓴 것이 없어 역사적인 신빙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초선과 관우의 사랑 이야기는 현재까지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초선의 역사적인 존재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인지 전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에서 초선이 여포의 아내였다는 설정도 있고 초선이 여포의 부장의 아내였다는 설정도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조조가 여포를 공격하는 순간부터 시작합니다.
 당시 유비 삼형제는 조조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조조의 여포 공격에 참여했었지요.
 조조의 최고의 맹장인 관우는 조조에게 여포가 항복하면 여포의 부장의 아내인 초선을 달라고 청했고 조조는 이를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여포가 항복한 후에 관우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여포를 죽인 후에 초선을 데려가지요.
 관우는 조조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유비가 조조를 떠난 후에 조조는 유비를 공격했는데, 유비는 패하여 도망쳤고 관우는 유비의 아내를 지키기 위해서 언젠가 유비에게 돌아갈 것을 약속받은 후에 조조에게 항복했지요.
 평소에 관우의 충성심과 용맹을 높이 평가한 조조는 관우를 자신의 부하로 만들기 위해서 초선을 관우에게 주었습니다.
 과거에 관우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관우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초선과 관우는 첫눈에 서로 사랑에 빠졌습니다.
 관우는 당대 최고의 미녀인 초선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초선은 당대 최고의 영웅인 관우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둘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관우로서는 초선을 받으면 조조에게 너무 큰 신세를 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초선에게 자결을 명하였다고 합니다.
 초선의 아름다움에 빠져 유비에 대한 충성심을 잃게 될까봐 초선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관우가 초선과 헤어지기 전에 관우를 사랑했던 초선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초선과 관우의 이러한 사랑 이야기는 진수의 삼국지에 관우가 대단히 아름다운 미녀였던 여포의 부장 아내를 처로 삼으려고 했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어 진 이야기로 추측되고 있지만 여포의 부장의 아내가 초선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보면 초선은 사도 왕윤의 가기로 여포와 동탁 사이에서 미인계로 둘의 사이를 이간시켜서 여포가 동탁을 배신하여 죽이도록 만들었지요.
 하지만 초선의 미인계 이야기는 허구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나관중은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정을 통해서 동탁과의 관계가 나빠졌다는 진수의 '삼국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초선이라는 미녀를 소설에 등장시켜 사실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초선은 무려 3번이나 자결을 한다는 것이지요.
 첫번째는 동탁이 여포에게 주살당하자 초선은 자결하였다는 이야기이고, 두번째는 조조가 자신을 차지하기 위해서 여포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자결한다는 이야기이고, 세번째가 바로 관우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자결을 한다는 이야기지요.
 세번째 이야기는 관우가 자결을 명령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관우가 그녀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녀 스스로 자결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이것은 송나라 이후 여자는 평생 한 남자만 섬겨야한다는 사상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첫번째 자결 이야기는 192년, 두번째 자결 이야기는 198년, 세번째 자결 이야기는 200년에 있었던 것이지요.
 정조를 잃은 여성은 자결해야 한다는 명나라 시대의 사상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초선이 관우와 만난 후에 관우가 죽을 때까지 초선이 관우를 따랐다는 이야기도 있다는 것이지요.
 초선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초선과 관우의 사랑 이야기는 원나라 시대의 경극이나 잡극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보다 조금 앞선 시기라고 합니다.
 최근들어 초선이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지만 초선이 중국 4대 미녀로서 여러 차례 중국 문헌에 나왔다는 점과 초선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보다 더 일찍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초선은 실존인물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labyrint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어 보셨나요?
 네플류도프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카츄샤의 사랑은 여자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면서도 카츄샤가 네플류도프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러시아의 귀족 청년으로 친척집에 갔다가 그 집의 하녀인 카츄샤를 만났습니다.
 카츄샤는 네플류도프를 사랑했지만 귀족 청년과 하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네플류도프는 카츄샤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자신을 잘 따르고 좋아하는 예쁜 하녀에게 이성적인 호기심을 가진 정도가 아닐지요.

 한 때는 자신을 사랑했던 카츄샤를 순수하게 대했던 네플류도프는 타락한 천사가 되어 카츄샤에게 돌아왔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카츄샤를 유혹했고 카츄샤는 군입대를 압둔 그에게 몸을 허락하고 말았지요.
 네플류도프는 카츄샤에게 매춘 여성이 받는 정도의 돈만 남기고 홀연히 떠났습니다.
 카츄샤는 네플류도프의 변심한 태도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녀는 임신한 후에는 신경질적으로 변하여 주인집에서 품위를 잃은 행동을 하여 쫒겨 났지요.
 결국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진짜 매춘부가 되는 방법뿐이었지요.
 세상은 더이상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까요.
 매춘부가 된 카츄샤는 살인누명을 쓰고 법정에서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네플류도프를 만났지요.
 
 이 모든 불행이 네플류도프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에 카츄샤는 그를 미워하였지요.
 하지만 네플류도프가 카츄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자 마침내 그녀는 그를 용서했을 뿐 아니라 예전처럼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카츄샤와 결혼할 것을 결심했지만 카튜샤는 그의 행복을 위해서 그와 헤어질 것을 결심하지요.
 카츄샤는 네플류도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청혼을 거절하고 동료 죄수에게 시집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카츄샤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청혼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카츄샤를 붙잡지 않았지요.
 
 저의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카츄샤가 네플류도프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는 네플류도프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사랑보다는 죄의식이나 책임감 때문에 카츄샤와 결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지요.
 좀 더 네플류도프가 카츄샤에게 자신의 사랑을 확신시켜 주었다면,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카츄샤와 결혼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카츄샤가 믿게 만들 수 있었다면 그녀는 네플류도프의 청혼을 수락했을 지도 모르지요.

 개인적으로 네플류도프의 적극적이지 못한 태도가 아쉬웠습니다.
 그는 카츄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설득하지 않았지요.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녀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지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놓아준 카츄샤의 사랑은 위대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그녀를 설득하지 못한 네플류도프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Posted by labyr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