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헤어져."
 "어째서지?"
 "몰라서 물어?"
 "모르면 됬어."
 "이유라도 말해줘."
 "니가 모른다면... 난 할 말 없어."

 이렇게 해서 3년동안 사귄 여자친구 경희와 헤어졌다.
 경희와 헤어진 그 날부터 나의 심장은 이미 멎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고동소리도 나지 않았고, 아무 느낌도 없었다.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더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녀는 나의 삶의 전부였다.
 처음에는 지금은 괴로워도 시간이 지나면 그녀를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녀의 행동, 그녀의 말, 그녀의 미소, 그녀의 웃음소리, 그녀의 표정... 하나 하나가 마치 영화관의 필름이 돌아가듯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 예뻐?" 
언젠가 그녀는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띄운 채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당근 예쁘지."
 "얼만큼?"
 "하늘만큼 예뻐."
 "구체적으로 말해봐."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처럼... 넌 인간의 딸이 아니라 하나님의 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환성적으로 예뻐."
 "정말?"
 그녀는 화사하게 핀 장미처럼 활짝 웃었다.


 밤새 울다가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느라 한잠도 못잔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정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가 떠난 것일까?'
 '그녀는 어째서 나에게 이별의 이유조차 말하지 않은 것일까?'
 나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이유를 알기 전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습관적으로 티비의 리모콘을 눌렀다.
 티비에는 종말론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느 종말론자는 1999년 8월 18일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오늘이 1999년 8월 15일이니까 3일 후면 이 세상이 끝난다는 말이다.
 나는 졸음이 와서 티비를 껐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50년 후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종말이라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그녀가 생각났다.
 나는 나의 삶의 종말이 오기전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려고 했었는데, 정말 3일 후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가 더욱 보고 싶어졌다.
 나는 아침을 먹은 후에 그녀의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에 귀에 익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야, 철수야."
 "우리 집엔 무슨 일이지?"
 "잠깐 할 말이 있어서... 잠시 볼 수 없을까?"
 "알았어. 기다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는 대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를 보자 오랫동안 정지했던 심장이 고동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관절 무슨 일이야? 나 좀 있다 나가야 하니까 용건만 빨리 말해줘."
 "3일 후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내용의 방송을 봤어."
 "그래서?"
 "혹시라도...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세상에 종말이 오기 전에 널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서..."
 "호호호..."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크게 웃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슬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직도 나를 못있었니? 우리 헤어진지 한참 되었잖아. 제발 나를 잊어줘. 부탁이야."
 나는 한숨을 쉰 후에 말했다.
 "잊고 싶다고 잊을 수 있다면 벌써 잊었을꺼야. 하지만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어. 잊으려고 하면 잊을수록 더 생각이 나니까..."
 그녀는 잠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니? 밥은 먹고 다니니? 잠은 자고? 꼭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사는 사람처럼 보여.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
 "그것도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 같아. 밥도 넘어가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데... 난 들 어쩌겠니?"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래?"
 "8월 18일에 나와 함께 있어 줄 수 있니?"
 "왜지?"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마지막 순간에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바보같은 소리하지마. 종말은 오지 않아. 나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사람 예언이 다 맞은 것도 아닐 뿐더러 나는 하나도 믿지 않아."
 "하지만... 맞을 수도 있쟎아. 십분의 일이라도, 아니 백분의 일이라도..."

 그녀는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좋아, 8월 18일... 내가 그 날은 너와 함께 있어 줄께. 하지만 앞으로는 정신차리고 살겠다고 약속해줘."
 "알았어. 난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녀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면서 말했다.
 "약속해."
 나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녀의 새끼손가락이 나의 새끼손가락에 닿자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마치 식물인간이 되어 굳어 있었던 나의 육체가 그녀의 새끼손가락이 닫자 생명을 얻어 소생한 느낌이 들었다.
 지구의 종말이 오기 3일 전에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고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오랫동안 정지했던 심장이 다시 고동치자 나의 새끼손가락은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그녀는 나의 새끼손가락이 사시나무처럼 떨리자 '풋'하고 웃었다.
 나와 그녀는 새끼손가락을 건 채로 미소지으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Posted by labyr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