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세요?"
교통사고 이후에 의식을 회복한 경희는 마치 나를 처음보는 것처럼 대했다.
"지혜야, 나 모르겠어? 영수, 너의 남자친구!"
지혜는 고개를 강하게 흔들면서 말했다.
"죄송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나중에 기억나면 연락드릴테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나는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웠다.
'나와 결혼까지 약속한 지혜가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다니.'
뜻밖의 교통사고로 그녀의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뒷자석에 앉았던 그녀는 하늘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살아있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나는 지혜가 병원을 퇴원한 후에 여러차례 그녀의 집을 방문했지만, 그녀는 끝내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얼마후에 그녀는 어디론가 이사를 갔고, 나는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이대로 영영 이별하는 것인가?'
지혜가 말없이 떠난지 1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해 거리를 방황하곤 했다. 때로는 지혜와 함께 거닐었던 거리를 방황하다가, 때로는 지혜와 함께 갔던 카페나 식당에 가서 지난 날에 대한 회상에 빠지곤 하였다.
어느 날 지혜와 함께 갔던 카페를 찾아갔는데, 그녀가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회상에 잠겨 있었는데, 그녀의 테이블에는 두개의 커피가 놓여 있었다.
"지혜야! 나야 영수, 아직도 나 기억나지 않니?"
지혜는 나를 보자 깜짝 놀랐지만,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말했다.
"아, 네. 당신이군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아요. 죄송하군요."
나는 그녀의 허락도 받지 않고 테이블에 앉았다.
"기억해봐. 나 정말 모르겠어? 정말?"
"말씀드렸쟎아요. 전 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그러니 저를 힘들게 하지 말아주세요."
순간 나는 지혜의 눈동자를 보았다.
뭔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지닌 듯한 슬픈 눈동자였다.
왠지 지혜가 나를 기억하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다가가 키스를 했다.
백설공주의 왕자가 백설공주를 깨웠듯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왕자가 오로라공주를 잠에서 깨웠듯이 지혜를 잠에서 깨워줄지 모르니까.
지혜는 나를 밀친 후에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지혜야, 나를 봐. 내 눈을.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어? 정말?"
지혜는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영수야, 미안해. 널 기억해. 하지만 나는 이미 니가 알던 지혜가 아니야. 니가 아는 지혜는 세상에 없으니까 날 잊어줘."
"그런 말이 어디있어. 나를 너를 사랑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난 널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제발 이러지말고, 왜 나를 피하는지 말해줘."
지혜는 자리에 털석 주저 앉아 울었다.
한동안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지혜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은 후에 그동안의 사정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떠난 것인가? 나는 지혜에게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가를 수 없다고 말했다. 지혜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앉겼다. 나도 눈물을 흘린 후에 말했다.
"지혜야, 이제 우리 영원히 헤어지지 말자. 영원히."
지혜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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