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중에서-
숙종이 후원을 한가롭게 거닐고 있는데, 궁인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걸어오다 숙종을 보더니 황급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인사를 올리는 모습이 어설픈 것이 입궁한지 얼마 되지 않은 궁인인 듯싶었다. 고개를 숙인 목덜미 사이로 얼핏 보이는 궁인의 자태가 제법 고와 숙종은 호기심이 생겼다.
"고개를 들라."
순간 백옥처럼 하얀 궁인의 얼굴이 숙종의 시야에 들어왔다.
"전하를 뵙나이다."
고개를 수그린 채 몹시 수줍어하며 인사를 올리는 궁인의 자태는 숙종이 이제껏 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웠다.
"참으로 아름다운지고!"
숙종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오자 부끄러워 얼굴이 붉게 물든 궁인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를 어여삐 여겨 주시오니, 황공하기 그지없나이다."
"이름이 무엇이냐?"
"소녀, 옥정이라 하옵니다."
옥정이 내전에 들어서자, 순간 지극히 아름답고 기품있는 인현왕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래 전 가례식에서 열다섯의 앳된 얼굴이었던 인현왕후는 이제 약관의 나이로 그때보다 한층 성숙하고 아름다워 옥정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옥정은 멍하니 서 있다가 인현왕후와 눈이 마주치자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올렸다.
"소녀 장상궁, 중전마마께 인사 올리나이다."
인현왕후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진작 너를 부르려 했으나, 한해 두해 늦어지더니 어언 다섯 해가 지났구나. 그간 마음고생이 적지 아니하였을 것이나 이제 이렇게 입궁하였으니, 옛일은 잊고 마음을 추스려 전하를 잘 모시기 바란다."
"중전마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토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예전보다 훨씬 아름다워진 인현왕후의 자태를 보자, 옥정은 마음이 심난했다.
'중전마마께서 예전보다 더욱 아름다워지셨구나! 뿐만 아니라 나보다 여덟살이나 어리시니 전하의 총애가 중전마마께 기울까 참으로 염려되는구나!'
상대의 외모에 감탄한 것은 옥정 뿐만이 아니었다. 옥정을 처음 보는 인현왕후 역시 감탄하며 말했다.
"자태가 곱구나!"
"황공하옵니다."
"공주, 주저하시지 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선대왕이신 할바마마께서 승하하시기 수개월 전에 사냥을 하실 때 여우를 잡으셨사온데, 여우가 죽기 전에 발버둥치고 발악하여 할바마마께서 크게 놀라셨다 하옵니다. 바로 그날 밤 할바마마께서 기이한 꿈을 꾸셨는데, 여우가 꿈에 나타나 '나는 백년 묵은 여우라 얼마 후면 사람이 될 터인데, 너의 화살을 맞고 죽었으니, 어찌 이 한을 풀지 않겠느냐? 내 반드시 사람으로 환생하여 너의 후손에게 복수하리라'말하고 사라졌다 하옵니다. 할바마마께서는 꿈이 너무도 생시같아 어마마마께 말씀하셨다 하온데, 그때로부터 불과 넉달 후에 할바마마께서 갑작스러운 변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하옵니다. 참으로 기괴한 일이 아니옵니까?"
"과연 기괴한 일입니다. 허나 그것이 옥정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후 어마마마께서 사람을 시켜 확인하신 바, 옥정은 할바마마께서 그 여우를 사냥한 지 아홉달 후에 태어났다 하옵니다. 이 또한 기괴한 일이 아니옵니까?"
당시, 민간에는 백 년 묵은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전설이 있어 대비로부터 효종의 꿈 이야기를 들은 명안공주는 옥정이 백 년 묵은 여우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인현왕후는 이러한 명안공주의 의중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참으로 기괴하기 짝이 없소만, 공주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 뿐만이 아니옵니다. 어마마마께서도 변고를 당하시기 전에 참으로 기괴한 꿈을 꾸셨다 하시온데, 꿈에서 옥정이 한 맺힌 눈으로 노려보다 별안간 여우로 둔갑하여 덤벼들어 어마마마께서 몹시 놀라 깨셨으나 꿈이 생시처럼 분명하여 기이하게 생각하시고 소녀에게 말씀하셨사옵니다. 하온데 어마마마께서는 그 꿈을 꾸신 후 달포도 아니되어 승하하셨사오니, 이 또한 참으로 기괴한 일이 아니옵니까?"
이 시각 박태보는 죄인의 신분으로 함거에 실려 아내 이씨와 함께 유배지인 진도로 가고 있었는데, 인현왕후가 폐출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탄식하며 대성통곡하였다.
"중전마마, 중전마마의 폐출을 막지 못한 소신의 불충을 용서하여 주소서. 중전마마......"
박태보는 충격으로 혼절했다. 바로 그때, 서른 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나는 듯이 달려오더니 고문으로 살갗이 벗겨지고 피투성이인 박태보의 손을 잡았다.
"나리, 쇤네를 기억하시옵니까? 아랑이옵니다. 한평생 나리만 사모해온 아랑이옵니다. 눈을 뜨소서. 쇤네를 한번만 봐주옵소서."
여인의 목소리가 어찌나 애처로운지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박태보의 부인 이씨를 바라볼 뿐이었다. 박태보의 하인들이 어찌 할지 눈짓으로 묻자 이씨가 입을 열었다.
"내버려 두거라."
여인은 박태보의 벗인 이종엽의 하녀 아랑으로, 십년 전 심부름왔다가 신선처럼 외모가 수려한 박태보에게 반해 진심을 털어놓은 후 하녀로 받아달라 간청했었는데, 그때 박태보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 여인이 자신을 잊을까 하여 십년 후에 다시 찾아오라 말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박태보는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아랑은 박태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여지껏 기다려 오다가 박태보의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박태보는 옛일을 떠올리며 그윽한 눈으로 아랑을 바라보다가 이씨에게 들릴 듯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이 여인이 의리를 아는 듯하니, 하녀로 들이는 것이 어떻겠소......"
박태보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변함없이 사모하는 아랑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던 것이다.
이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랑이 박태보와 이씨에게 큰절을 했다.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떨리는 손으로 박태보의 왼손을 다시 잡은 아랑은 행복해 보였다. 혹독한 화형으로 얼굴이 상처와 흉터 투성이가 되어 신선과도 같던 수려한 모습을 완전히 잃은 박태보를 아랑은 예전보다 더욱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박태보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씨는 가만히 박태보의 오른손을 잡았다. 박태보는 두 여인에게 손을 잡힌 채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은 후 세상을 떠났다.
"중전마마를 부탁하오......"
박태보는 자식이 없음에도 첩실을 두지 않아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언젠가 이씨가 첩실을 들이라 권유했을 때 박태보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될 말씀이오. 첫째는 한 여인만 섬기는 장부로서 지조를 지키기 위함이요, 둘째는 자식을 서자로 만들어 한을 남기지 아니하기 위함이니, 더는 말씀을 말아주시오."
만고의 충신이자 천하에 둘도 없는 애처가였던 박태보의 부음 소식에 온 나라의 백성들이 땅을 치며 통곡했다.
황금 화관을 쓰고 붉은 대례복을 입고 어전에 오른 옥정은 책봉식에 참석한 하객들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날따라 더 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옥정을 숙종은 뿌듯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승지가 어전에 올라 중전 책봉문을 읽었다.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태양과 달을 비추어 천지를 돌보고 덕으로 세상을 다스림과 같이 임금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진 왕후의 보필이 필요하매, 덕이 후궁 중에 으뜸인 장씨를 과인의 배필로 맞을까 하니 절차에 따라 책봉식을 거행하라."
조상궁이 옥정에게 중전의 인장이 있는 옥책함을 건내자 승지가 새 중전이 책봉되었음을 선포했다.
-중략-
대신들의 하례를 차례로 받던 중 옥정은 문득 조사석이 책봉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조대감께서 나를 중전으로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일까? 아니다. 나를 아껴오신 조대감께서 그러실 리가 있겠는가!'
순간 옥정의 시야에 조태구가 들어왔다. 옥정이 입궁한 후 처음 보는 것이니, 거의 10년 만의 재회였다. 조태구는 멋쩍은 듯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하례를 올렸다.
"중전마마, 곤위에 오르심을 감축드리나이다. 천귀와 천복을 누리시고 만수무강하소서!"
조태구의 하례 인사 한마디 한마디에 충심이 느껴졌다. 조사석이 서인의 편에 가담했는지 노심초사하던 옥정은 이러한 조태구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옥정은 조태구가 자신과의 의리를 버리지 않는 한 조사석 또한 자신의 어머니 윤씨와의 의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중전 책봉식이 끝난 후 집으로 향하는 조태구의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아버님께서 중전마마의 책봉식에 오시지 아니하신 것은 필시 폐비 마마와의 의리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 또한 중전마마와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으니 이를 어찌하랴!'
집에 도착한 조태구는 곧장 조사석의 처소를 찾아갔다. 조사석은 담뱃대를 문 채 말이 없었다. 조태구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버님, 어찌하여 중전마마의 책봉식에 오시지 아니하셨나이까?"
조사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아비의 마음속에 있는 중전마마는 오직 한분이시니라."
조사석의 말에 조태구는 충격으로 멍하니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하오면, 아버님께서는 작금의 중전마마를 인정하지 아니하시렵니까?"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 이 아비에게 중전마마는 오직 한분 뿐이신 것을......"
"하오나, 아버님께서는 작금의 중전마마를 친딸처럼 아끼지 아니하셨나이까?"
조사석은 눈물을 글썽이는 조태구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딸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 어찌 어미와의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느냐?"
"하오면, 소자는 어찌해야 하옵니까? 소자 또한 작금의 중전마마와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나이다."
애타는 목소리로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는 조태구에게 조사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때로는 아들의 길이 아비와 다를 수도 있는 법, 네 뜻대로 하거라."
"아버님......"
조태구는 가슴이 복받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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