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조정우 역사소설 줄거리
드넓은 평지에서 청색 격구복을 입은 행주 고을의 기수들과 백색 격구복을 입은 철원 고을의 기수들이 한 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게 격구 시합을 벌이고 있었다. 열대여섯 쯤 되어 보이는 철원 고을의 소년이 전광석화처럼 행주의 기수들을 제친 후 장시로 공을 후려쳐 구문 안으로 집어넣다.
행주, 철원 두 고을 처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준수한 소년은 최영이었다. 최영이 손을 들어 환호성에 답례하고 있는데, 기완자가 장시를 치켜든 채 최영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년 전 충숙왕은 여인이 격구하는 것을 금하여, 부득이하게 남장을 하고 시합에 참가한 기완자는 최영을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만 것이다. 경기는 최영이 혼자 네 골을 넣은 철원 고을의 격구단이 행주 고을의 격구단을 60푼 대 45푼으로 이겼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고려 최고의 격구 기수 박불화가 있는 행주 고을의 승리가 예상된 터라 철원 고을에 승리를 안긴 최영은 한순간에 영웅이 되었고, 때마침 격구장에 있던 기자오는 딸의 마음을 눈치채고 최영을 집으로 정중히 초청하였다.
아직 어린 나이에도 영웅의 기상을 지닌 최영을 사위로 낙점한 기자오는 최영도 자신의 딸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몹시 기뻐했다.
며칠 후, 기자오가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에게 사람을 보내 혼담을 청했지만, 최원직은 기자오의 집안이 부유한 데 비해, 자신의 집안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한동안 마음에 병이 생겨 앓아 누웠던 기완자는 마음을 굳게 먹고 최원직을 찾아갔다. 최원직은 지극히 아름다운 절세미인이면서 품행에 기품 있는 기완자를 보자 갈등하였으나, 기완자가 가난한 자신의 집안에 시집와 고생하다 세상을 떠난 아내 지씨의 전철을 밟을까 걱정되어 혼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최원직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영이 3년상을 마칠 무렵, 느닷없이 기완자가 찾아왔다. 언니 기연자로부터 조만간 공녀 선발을 위해 금혼령이 공표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기완자는 당장 박불화와 혼례식을 올리라는 어머니 이씨의 명을 거역하고 최영을 찾아온 것이었다.
기완자의 혼담을 받아들인 최영은 임시 방편으로 매파를 데려와 기완자와 혼약을 맺었다. 혼약을 맺은 여인은 공녀로 선발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에 최영은 기완자보다 누이동생 최희가 더 걱정되어, 혼례식을 미루고 백부 최원중의 집에 가있는 최희를 데리고 와서 기완자의 집에서 혼례식을 올릴 계획이었지만, 마차를 몰고 오는 도중 공녀로 끌려가던 유화를 구출하는 사이에 결혼도감 관원들이 기완자를 공녀로 차출해 가버렸다.
최영과 기자오는 기완자를 공녀 명단에서 제외시키기 위해 결혼도감을 찾아가고, 충숙왕에게 알현을 청하였지만,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최영은 기철과 박불화를 비롯한 행주 고을의 사내들, 유화의 오라비 유총, 유씨 가문의 하인들과 함께 원나라 사신단을 습격하여 기완자를 구하려 했지만, 원나라 최고의 용장 탈탈이 이끄는 몽고군의 철통같은 방어망과 무시무시한 대포의 위력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다. 이어 최영은 압록강에서 다시 거사를 일으켜 기완자를 구할 계획이었지만, 최영과 가문에 화가 미칠까봐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는 기완자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기완자는 한달여 만에 대도성의 대내에 입궁했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기완자는 대내 총관 독만질아의 주선으로 겨우 열네 살인 황제 토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이때 토곤은 허울 뿐인 허수아비 황제로 이 당시 원나라의 권력은 황후 타나실리의 아비인 권신 엘테무르의 손에 있었다.
아버지 명종이 엘테무르에게 독살당한 토곤이 자신의 신변에 대해 불안해하자 기완자는 자신에게 사모의 정을 품은 탈탈을 황궁 시위대장에 임명할 것을 권했다. 토곤이 기완자의 말을 받아들여 탈탈을 시위대장에 임명하자, 엘테무르는 거사를 일으켜 토곤을 폐위시키려 했지만, 눈물을 흘리며 말미를 달라고 애원한 타나실리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거사를 미루었다.
그 후 기완자는 타나실리의 질투로 인해 심한 채찍질을 당하고, 정신을 잃은 채 불임약을 강제로 마셔야 할 위기에 처했지만, 고용보로부터 소식을 듣고 달려온 토곤이 기완자를 구했다. 이때 차마 대도를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던 최영은 이 소식을 듣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곧장 고려의 전왕 충혜의 호위군이 되었다.
최영이 그 당시 평판이 나빴던 충혜의 호위군이 된 것은 대도에 있는 고려인들과 함께 기완자를 지키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던 것이다. 한편 오래전부터 기완자를 사모해왔던 박불화는 귀비에 책봉된 기완자를 곁에서 지키기 위해 거세하고 환관이 되었다. 기완자가 서서히 황궁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을 무렵, 엘테무르가 갑자기 피를 토하며 급사했고, 대도는 실로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엘테무르의 두 동생 사둔과 답리는 야심이 큰 인물이 못되었다. 사둔이 죽자, 문종의 양자로 황제에 오르려는 야심을 품은 탑자해가 당기세를 부추겨 숙부인 답리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어사대부 탈탈이 당기세를 죽인데 이어, 최영이 수천의 고려 의병을 이끌고 와 함락 직전인 황궁을 구원하고 답리를 죽이자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후 타나실리 황후는 폐위되었고, 토곤은 기완자를 황후로 맞으려 했지만, 황후족인 옹기라트 가문인 우승상 백안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토곤의 숙모 황태후 보다시리 역시 반대하자, 결국 토곤은 옹기라트 가문인 백안의 양녀 백안홀도를 황후에 책봉했다.
기완자가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를 낳자, 우승상 백안은 기완자만을 총애하는 토곤의 편애에 불만을 품고, 황태제 연첩고사의 어미인 황태후 보다시리와 손을 잡고 토곤을 능가하는 권력을 거머쥔 후 자기 멋대로 이민족 차별법을 만들어 시행하는 전횡을 자행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백안은 산후 후유증을 앓고 있던 기완자의 탕제에 짐독을 넣어 독살하려 했지만, 박불화가 탕제를 검사하기 위해 마시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토곤은 탈탈을 믿으라는 기완자의 권고를 받아들여 백안의 조카인 탈탈에게 백안을 추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자신의 양부이자 백부인 백안을 추포하라는 토곤의 명을 받은 탈탈은 눈물을 머금고 백안에게 가문의 근거지인 통주로 사냥을 떠날 것을 제안해 대도성 밖으로 유인한 후, 거사를 일으켜 백안을 실각시켰다.
제2황후에 책봉된 기황후는 황태후의 직속 기관 휘정원을 황후의 직속 기관 자정원으로 개편하여 원나라의 재정과 권력을 한손에 거머쥐었다.
이 무렵, 충혜왕의 아우로 열두살인 왕기가 어머니 명덕태후와 함께 대도에 오게 되었고, 기황후는 어린 나이에 먼 타국땅으로 온 왕기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기황후가 호위 무사로 추천한 최영을 무예 스승으로 모신 왕기는 2년 후, 황실의 사냥터에서 토곤이 자신의 배필로 점지한 노국공주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몽고 공주들에 의해 출궁되었던 어머니 명덕태후의 반대에 부딪친 왕기는 노국공주와의 혼담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6년이 지나서야 왕기는 기황후의 주선으로 노국공주와 혼인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열세 살인 충정왕의 실정으로 고려가 어지러워지자, 왕기가 기황후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바로 공민왕이다.
스물둘의 나이로 보위에 오른 공민왕은 이듬해 2월 초하루 토지 개혁법과 노비 면천제 등의 법령을 만들어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했다. 당시, 원나라 전국 각지에서 홍건적을 비롯한 한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중 장사성이 대운하의 요충지를 장악하자, 원나라에서 고려로 사신을 보내 응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대도의 고려인을 주축으로 응원군을 결성하자는 최영의 의견을 받아들여 정병 2천에 모집병 3천, 총 5천의 병력을 파병했고, 최영은 기황후의 주선으로 대도에서 1만8천의 고려인을 모집하여 원정에 나섰다. 최영이 이끄는 2만 3천의 고려군은 연전연승하여 장사성이 점령했던 30여성을 원나라 조정에 돌려준 후 장사성의 근거지인 고우에서 원나라 사령관 탈탈이 이끄는 20만 원군과 합동 작전을 펼쳤다.
최영의 고려군이 용전분투하여 고우성의 성문을 열었지만, 탈탈은 “고려군과 장사성군이 혈전을 벌이면, 내일 아군이 손쉽게 고우성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오.”라는 이사제의 말에 공격을 주저했다. 그때 천지를 개벽시킬 듯한 최영의 용맹을 본 탈탈은 20여 년 전 복면한 무리들을 이끌고 자신이 호위대장으로 있던 사신단을 기습했던 자가 최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최영을 하옥시켰다.
이로 인해 고려군이 진영을 떠났고, 원나라 단독으로 고우성을 공격했지만, 토곤이 탈탈을 공이 없다 책망하여 해임시키자, 원군이 동요하는 틈을 타 공격에 나선 장사성군에게 원의 20만 대군이 궤멸당했다.
이후 원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자, 공민왕은 고려에서 권세를 휘두르고 있던 기황후의 일가를 멸문시켰다. 기황후는 공민왕의 배신에 격노하였지만, 홍건적의 난으로 고려를 칠 여력이 없었다.
홍건적의 난이 진압된 1363년, 죽은 줄 알았던 기철의 넷째 아들 기새의 부추김에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왕위에 세운다는 조서를 발표했고, 이듬해 1364년 1월, 아이유시리다라가 2만 병력을 이끌고 고려 원정에 나섰지만, 수주에서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에 참패하여 퇴각하였다.
당시 원나라 조정은 기황후를 따르는 친황태자파와 기황후를 반대하는 친황제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기황후가 친황제파의 수장인 태평과 노적신을 해임시키자, 노적신은 패라첩목아에게 가서 거병을 부추겼다. 패라첩목아는 대도성을 점령하여 조정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이에 아이유시리다라가 자신을 지지하는 태원의 군벌 왕보보에게 가서 원군을 청하였다.
왕보보는 이듬해 거병을 일으켜 30만 대군을 이끌고 대도로 진격했고, 패라첩목아는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1368년, 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원나라가 내전으로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원나라 정벌에 나섰다. 다급해진 원나라 황제 토곤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응원군을 보내달라 청하였으나, 고려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 기황후가 눈물을 흘리며 대도를 사수할 것을 간청했으나, 토곤은 대도를 버리고 만리장성 북쪽의 상도로 퇴각할 것을 결정했다. 도읍을 잃은 원나라는 그 여파로 중원의 땅을 모두 잃고, 결국 그들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몽고 초원으로 쫓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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