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받는 한신과 중국 역사상 최고의 용장으로 평가받는 항우의 대결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힙니다. 항우가 거록에서 수 만의 병력으로 진나라의 명장 장한의 20만 대군을 격파하여 패망의 위기에 있던 초나라를 구하고 결국 진나라를 멸망시켰다면, 한신 역시 항우에게 연전연패하며 패망의 위기에 있던 한나라를 구하고 마침내 해하에서 항우가 이끄는 초군을 대파하여 항우의 초나라를 멸망시켰지요. 


   항우는 초나라의 전설적인 명장 항연의 손자로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명성을 얻었고 겨우 23살의 나이에 숙부인 항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항량이 진나라의 명장 장한에게 참패하여 초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항우는 겨우 수 만의 병력을 이끌고 명장 장한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격파하여 천하를 호령하는 지도자가 되었는데, 한신 역시 사마흔, 동예와 함께 삼진을 지키던 명장 장한을 대파하고 유명해 졌지요. 우연하게도 항우, 한신 모두 명장 장한을 격파하고 유명해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장한은 진나라 말기의 뛰어난 명장인데, 항우와 유방과 한신이 모두 장한을 명장이라고 말한 기록이나, 그가 연전연승 중이었던 항량을 대파하여 전사시킨 것과 항우가 이끌었던 40만 대군을 20만의 병력으로 대등한 싸움을 한 것이나, 파죽지세로 진나라 수도까지 진격했던 진승의 난을 쉽게 진압했다는 기록을 보면 정말 대단한 명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이러한 명장 장한이 항우와 한신에게 모두 패함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비운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한신이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장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당시 무적이였던 항우가 이끄는 초군을 해하에서 대파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초와 한의 최후의 전투인 해하의 전투에서의 승리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긴 것이기 때문에 정말 한신이 항우보다 더 뛰어난 명장이였는지 판단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신의 주군이었던 한고조 유방은 팽월의 맹활약이 없었다면한신이 항우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는 팽월의 부장 난포의 의견에 동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항우와 한신에 대해서 한고조 유방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지요.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항우가 한신보다 더 뛰어난 명장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쩌면 한신은 로마의 스피키오 장군이 군사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카르타고의 한니발을 대파하였지만 승리에도 불구하고 하니발이 더 위대한 명장으로 평가받는 것처럼 두 배 이상 많은 병력으로 항우를 이겼으니 이긴 한신보다 패한 항우가 더 위대한 명장이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항우는 해하의 전투에서 패함으로 그의 70전 무패라는 기록이 깨지면서 자신을 최초로 격파한 한신에게 화려했던 명성을 빼았긴 것이 아닌가 싶네요. 하지만 천재성에 있어 항우를 따를 사람은 중국 역사상 그 누구도 없을 것입니다.

   항우는 25세의 나이로 초나라 대장군이 되서 거록에서 진나라의 명장 장한의 20만 대군을 격파했고 해하에서 패하여 자결했을 때, 그의 나이가 불과 30세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항우는 미완성의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항우는 20살에 왕이 되어 33세에 죽은 서양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는 알렉산더 대왕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우가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알렉산더 대왕처럼 대제국을 세웠을지도 모르지요.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은 항우가 한신보다 더 뛰어난 명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신이 두 배이상 많은 병력으로 항우를 이겼다고 한신을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공정한 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신은 팽월, 경포, 유방, 이좌거 등의 뛰어난 명장들과 함께 싸운 것에 비하여 항우는 자신의 수족과 같은 범증과 종리매가 떠난 후에 홀로 외롭게 한신을 상대해야만 했지요.

 
   항우가 자신의 부하들을 잘 관리하지 못한 것도 장군으로서의 부족한 점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아무튼 항우의 뛰어난 군사적인 재능은 한신을 능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항우 자신이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무장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한신이 아무리 뛰어난 군사 전력가라고 해도 항우의 무용이 워낙 뛰어나서 한나라 병사들은 항우라는 말만 들어도 달아날 정도로 항우를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해하의 전투에서 패한 항우는 불과 28명의 병사를 이끌고 관영 장군이 이끄는 5000 기병을 대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처럼 한나라의 병사들은 항우를 두려워 했기 때문에 항우가 좀 더 적극적으로 선제 공격을 했다면 승부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만약 항우가 해하의 전투에서 패한 후에 오강을 건너 고향으로 도망친 후에 재기하였다면 유방의 천하통일은 불가능하였겠지요. 그 이유는 항우가 비록 해하에서 패하였다고 해도 초나라 백성들은 항우를 여전히 따랐고 항우의 지지 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에 항우는 재기할 수 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우는 천하의 명장이기 때문에 한신이 수 십만 대군을 동원한다고 해도 강이라는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한다면 한신도 어쩔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항우는 고향의 8000여 명의 젊은이들을 죽게 만들어 고향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하였지요. 항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이야기지만 항우의 이러한 여린 마음은 그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지요. 한신과 항우, 둘 중에 누가 더 강한지는 싸워 봐야 아는 것이지만, 당시 역사적인 기록으로 봤을 때 한신과 항우 둘만을 비교했을 때는 항우가 좀 더 우세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초한지 시대는 화살의 위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우와 같은 용장이 맹위를 떨치는 시대였으니까요. 무엇보다 항우는 아픈 병사를 보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병사들을 아꼈기 때문에 병사들이 항우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 무적에 가까웠지요.

   항우가 한신에게 패한 것은 병력이 한신의 절반(한신 20만, 항우 10만)밖에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항우의 초나라 병사들이 오랜 전투로 지쳤는데다 사면초가라는 한신의 기가 막힌 심리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신이 항우보다 앞서는 것은 부하를 다루는 능력입니다. 한신 휘하에는 뛰어난 장수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한신의 장수 중에 가장 유명한 장수가 이좌거였는데, 한신은 이좌거를 스승으로 모실 정도로 우대했습니다. 항우가 범증을 의심하여 떠나게 만든 것과는 달리 한신은 주군인 한고조 유방을 끝까지 믿어 나중에 숙청당했는데, 그만큼 충직한 성격으로 부하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지요.


   결과적으로 한신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좌거, 팽월, 경포 등의 명장을 잘 활용했기 때문인데, 항우가 자신의 양팔같은 존재였던 범증과 종리매를 의심하여 떠나게 만든 것과는 대조적이지요. 한신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잘 활용할 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에 항우는 군사적인 능력은 한신보다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의심이 많아 뛰어난 부하들을 활용하지 못하여 결국 한신에게 패했던 것이지요. 개인적인 능력은 항우가 한신보다 앞서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부하들을 잘 활용하는 한신이 이길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신이 항우를 제치고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닐지요.


Posted by labyr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