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 조정우 시대소설 미리보기 



장옥정

저자
조정우 지음
출판사
청어 | 2013-04-0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어 너와 영원히 함...
가격비교



   불광리, 방이 아흔아홉 칸이나 되는 대궐 같은 저택의 정원에 오색 비단옷을 곱게 차려 입은 젊은 낭자가 화사하게 핀 정원의 꽃들을 감상하며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백옥처럼 하얀 얼굴에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채 사뿐사뿐 걸어가는 낭자의 자태는 월궁 선녀가 하강한 듯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활짝 핀 모란을 바라보는 낭자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꽃들이 만개한 봄이 왔건만 어쩐지 내 마음은 한겨울과도 같구나! 여태 이 나이가 되도록 배필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올해로 스물두 살인 낭자의 이름은 장옥정이었다. 열둘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종백부 장현의 슬하에서 열 번째 봄을 맞는 옥정은 여태껏 배필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휩싸여 있었다.

   '언제쯤 내 배필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 아버님의 반만 되는 사내만 되어도 내 마다하지 아니하련만......'

   옥정의 아버지 장경은 학문과 재능을 겸비한 조선 제일의 역관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옥정이 겨우 열두 살 때, 역시 역관으로 조선 최고의 거부가 된 사촌형 장현에게 처자식을 부탁하는 유지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옥정이 혼기가 되자, 장현은 양반 가문 중에서 여러 혼처를 알아보았건만, 옥정은 항상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첩실은 싫사옵니다. 중인의 가문이라도 정실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기실 마음이 갔던 혼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양반의 위세를 내세워 옥정을 첩실로 들일 생각이었기에 혼사를 거절했던 것이었다. 정실이 아니면 시집가지 않겠다는 옥정의 고집에 장현은 어쩔 수 없이 중인의 가문에서 혼처를 구해봤지만, 옥정의 마음이 가는 혼처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조선팔도 강산에 어찌 이다지도 사람이 없단 말인가!'

   옥정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상념에 잠겨있을 때, 시녀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씨, 주인 어르신께서 아씨를 찾으시옵니다."

   옥정은 곧장 장현의 처소로 발걸음을 하였다.

   "소녀를 찾으셨나이까?"

   장현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운을 뗐다.

   "내, 방금 동평군을 뵙고 왔느니라."

   인조의 서자 숭선군의 장자인 동평군은 예전부터 장현이 마음에 둔 혼처였지만, 옥정이 거절한 바 있었다. 약관의 나이인 동평군은 학식이 있고 외모도 준수하여 옥정이 바라는 수준의 혼처였지만, 이미 정실이 있는 동평군의 첩실이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옥정은 고개를 숙인 채 장현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동평군께서는 임금의 승하 시, 왕위를 계승하실 분이시다. 동평군께서 너를 어여삐 여기고 계시던데, 정녕 마음을 돌릴 수 없겠느냐?"

   옥정은 말이 없었다. 싫다는 표정이었다. 장현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영의정 허적의 아들 허견이 일으킨 역모에 숙종의 근친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삼형제가 연루되어 귀양간 터라, 왕자가 없는 숙종이 승하한다면, 동평군이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다. 장현은 이처럼 위풍당당한 왕족 동평군에게 옥정을 맺어주고자 했지만, 옥정은 확고부동해 보였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장현이 입을 열었다.

   "마음에 둔 혼처라도 있느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첩실로 가기가 싫은 것 뿐이옵니다...... 소녀, 역관의 처가  될지언정, 그 누구의 첩실도 되고 싶지 아니하나이다."

   "그게 정녕 너의 뜻이라면...... 어찌할 수가 없구나."

   "송구하기 짝이 없나이다."

   "괜찮다. 이 백부는 너의 행복을 바랄 뿐이니라. 다른 혼처를 구해보마."

   "소녀, 백부님의 크신 사랑에 감읍할 따름이나이다."

   옥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현이 말했다.

   "내 시급히 처리할 일이 있으니, 그만 나가보거라."

   이때 장현은 자신이 자금을 대준 복선군 삼형제가 역모에 연루되어 그 화가 자신에게까지 미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현의 처소를 나오는 옥정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백부님께서 나를 친딸처럼 총애하시거늘, 난 백부님을 실망시키기만 하는구나. 허나, 어머님의 뜻도 나와 같으니 어찌 이것이 나의 잘못이겠는가!'

   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본시 역관 윤성립의 딸로 어릴 적엔 부족함 없이 살았으나, 억울하게 누명을 쓴 소현세자비 강빈의 역모에 연루되어 온 가족이 노비의 신분으로 몰락한 비운의 과거를 지닌 여인이었다. 미색이 빼어났던 윤씨는 대왕대비 조씨의 사촌동생 조사석 처의 여종으로 있던 중 우여곡절 끝에 장경의 첩실로 들어갔다가 정실이 되었다. 첩실의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윤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옥정을 정실로 시집보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장현도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옥정을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옥정은 마음을 다스리고자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이내 애절하면서도 구슬픈 거문고 가락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아버님께서 너무 일찍 이승을 떠나셨사옵니다. 소녀, 아버님께 거문고타는 법은 배웠으나, 혼인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배워야 하나이까?'

   거문고의 명인인 장경에게 배운 옥정 역시 거문고에 대단히 뛰어났다. 봄바람을 타고 마당으로 울려 퍼지는 옥정의 거문고 소리는 사람의 혼을 사로잡을 정도였다. 옥정이 세상의 고민을 머리에서 지운 채 한창 거문고 연주에 몰입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마당에서 온 집안이 떠나갈 듯이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장현과 장현의 일가를 추포하라는 전하의 명이시다! 장현의 일가 사람들은 식솔 식객 하인 가릴 것 없이 모두 오라를 받으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옥정이 깜짝 놀라 급히 거문고를 밀어 놓고 일어나는 순간, 옥정의 시종 철영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포도청의 포졸들이 들이닥쳤나이다. 속히 따라오소서!"

   "대체 무슨 일이냐?"

   "큰 사단이 난 듯하니, 일단 피하소서."

   철영이 옥정의 손목을 나꿔채 방을 나서자, 옥정이 외쳤다.

   "신을 다오!"

   철영은 다급히 분홍꽃신 한 켤레를 집어든 후 옥정의 손목을 다시 잡아 뒷문으로 끌어갔다. 옥정은 버선만 신은 채 끌려가던 중 어머니 윤씨와 오라비 장희재가 떠올라 멈추어 섰다.

   "어머님과 오라버니는 어디계시느냐?"

   "일각이라도 지체하단 모두 잡힐 것이옵니다. 아씨라도 피하셔야 하옵니다."

   철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철영이 옥정의 손목을 잡아 끌고 가자, 포졸 하나가 호통쳤다.

   "멈추어라! 도망치면 죄가 커지니, 순순히 오라를 받거라!"

   도망칠 새도 없이 포졸들이 사방에서 포위하며 달려왔다. 옥정은 도망쳐도 잡힐 것 같아 철영의 손에 몇 걸음 끌려가다가 멈추어 섰다.

   "너나 도망치거라. 나는 발이 느려 아니되겠다."

   옥정이 멈추자, 철영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철영이 애타게 탄성을 질렀다.

   "아씨!"

   그새 수십명의 포졸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서 순순히 오라를 받지 못할까!"

  포졸들이 오라를 들고 옥정과 철영에게 다가오는 순간, 누군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옥정의 손을 낚아챘다.

   "오라버니!"

  옥정의 오라비 장희재였다. 장희재는 옥정과 철영을 향해 다가가던 포졸들을 발로 차 넘어뜨린 후 옥정의 손을 잡고 달려가며 철영에게 외쳤다.

  "우릴 엄호해다오!"

  주인의 명에 철영은 재빨리 넘어진 두 포졸의 허리춤에 있는 몽둥이 두개를 빼내어 양손에 쥐고 미친 듯이 휘둘렀다. 워낙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포졸들이 주춤하는 틈에 옥정과 희재는 무사히 뒷문까지 달아날 수 있었다. 장희재가 뒷문의 빗장을 풀고 대문을 열어 젖히자, 옥정이 도망쳐 나온 곳을 바라보며 외쳤다.

   "철영은 어찌 하오리까? 어머님은요?"

   "일단 나가자! 우리가 살아야 어머님도 구할 수 있을 터."

   손목을 잡혀 어쩔 수 없이 희재를 따라나선 옥정은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뒷문에서 이어진 산길을 달려 장현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숲에 이르자 옥정이 숨을 헐떡이며 멈추어 섰다.

   "더는 못 가겠사옵니다."

   "그래, 잠시만 쉬도록 하자. 하지만 서둘러 멀리 도망쳐야 안심할 수 있다."

   옥정은 심호흡을 가다듬은 후 근심어린 얼굴로 말했다.

   "도망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질 않사옵니까? 어머님과 백부님을 구해야 하옵니다. 철영도요. 소녀, 조대감께 도움을 청할까 하옵니다."

    대왕대비 조씨의 사촌동생인 조사석은 옥정의 어머니 윤씨가 시집오기 전에 모시던 주인이자 정인으로 그 당시, 윤씨를 몹시 사랑했던 조사석은 옥정과 희재에게 한결같은 정을 베풀어왔다. 옥정의 말에 희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서석 대감께 가자꾸나."

   옥정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되옵니다. 오라버니께서는 장안을 떠나셔야 하옵니다. 저로 인하여 오라버니께서 포도청의 포졸들을 때려 눕히셨으니, 그 죄를 어찌 감당할지 모르겠사옵니다."

   옥정을 구하기 위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지른 일이었다. 옥정의 말을 듣고 보니, 희재는 걱정이 되었지만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너무 심려치 말거라. 조대감께서 계시지 않느냐?"

   "나라의 법을 어기면, 영의정의 자식이라도 죄를 면하기 힘든 일이옵니다. 아무래도 오라버니께서는 일이 수습이 될 때까지 일단 장안을 떠나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조대감께는 소녀가 저희 일가의 억울한 사정을 아뢰어 도움을 청하겠사옵니다."


   희재와 작별하고 조사석 집으로 향하는 옥정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다시는 조대감의 집에 가지 아니하려 하였건만, 이젠 피할 수가 없구나!'

   옥정은 자신을 항상 못마땅한 눈초리로 흘겨보던 조사석의 부인 권씨를 다시 대할 생각을 하니, 십 리도 안되는 길이 천 리 길이라도 되는 듯 걸어가는 길이 고단했다.

   30여 년 전, 역모의 누명을 쓴 부모님을 여의고, 갈 곳 없는 옥정의 어머니 윤씨를 하녀로 들인 권씨의 어머니 박씨는 윤씨를 가엾게 여겨 친딸처럼 보살펴주었다. 권씨 또한 윤씨를 가엾게 여겨 친자매처럼 대해주었는데, 조사석에게 시집간 권씨를 따라간 윤씨가 조사석과 밀회를 나누고 말았다. 그래서 권씨는 지금까지도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7년 전, 비단옷을 입고 어머니 윤씨와 함께 조사석 부부에게 신년인사 차 찾아온 열다섯 살의 옥정에게 권씨는 평생 잊지 못할 모욕을 주었다.

   "천한 종년의 딸이 비단옷을 입은 꼬락서니가 참으로 가관이구나!"

   조사석이 손님을 맞으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권씨는 그동안 쌓인 앙금을 옥정에게  풀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윤씨는 모욕감에 치를 떠는 옥정의 손을 꼭 쥔 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집으로 돌아온 후 윤씨는 이를 갈며 분해하는 옥정에게 눈물을 흘리며 타일렀다.

   "모든 것이 이 어미의 죄로 인한 것이다. 내가 마님께 큰 죄를 지었음에도 마님께서는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나를 네 아비와 맺어주셨다. 하여 네 오라비와 네가 태어난 것이니, 결코 마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옥정이 옛일을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을 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옥정아!"

   고개를 돌려보니 조사석의 아들 조태구가 하인 두어 명 함께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련님!"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누이처럼 다정하게 대해왔던 조태구를 보자, 영문도 모른 채 포졸들에게 쫓기고 있던 옥정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뻤다.

   "안색이 창백하구나! 몸은 괜찮은 것이냐? 네 어미와 오라비는 어디있느냐?"

   조태구는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옥정의 얼굴을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소녀와 오라버니는 도망쳐나왔으나, 어머님께서 포졸들에게 잡힌 듯하여 참으로 걱정이옵니다."

   "아버님께서 너희 가문에 생긴 일을 들으시고 곧장 포도청으로 가셨으니, 심려치 말거라."

   옥정은 탄성을 내뱉으며 물었다.

   "포도청의 포졸들이 들이닥쳐 주상의 명이라며 온 일가 사람을 추포하였사온데,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아시는 바가 있으시옵니까?"

   조태구는 분한 듯이 주먹을 불끈쥐었다.

   "서인들이 변란을 일으킨 모양이다. 수십의 남인 가문이, 너희 일가처럼 포도청의 몽둥이에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났다. 지독한 놈들......"

   순간 여기저기 찢어진데다 군데군데 흙이 묻은 옥정의 비단치마가 조태구의 시야에 들어왔다. 옥정은 워낙에 경황이 없던 터라 옷이 엉망이 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조태구의 시선에 그제야 얼굴이 붉어졌다.

   "속히 가마를 대령하라!"

   난데없는 주인 도령의 명에 하인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길 한복판에서 어찌 가마를 구해 대령하오리까?"

   "어허, 곤장을 맞고 싶지 않으면 속히 대령하거라."

   주인 도령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사방으로 흩어졌다. 옥정은 조태구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소녀는 괜찮사오니, 명을 거두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내가 알아서 하마."

   잠시 후 하인들이 제법 기품있는 가마를 들고 나타났다. 때마침 지나가던 양반댁 규수의 가마를 대왕대비의 친인척이라는 위세를 내세워 빼앗아온 것이었다.

   "가마를 대령하였나이다."

   "타거라. 우리 집으로 가서 아버님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상의해보자꾸나."

   "도련님의 크신 호의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옥정이 가마에 오르는 순간, 흙투성이에다 갈갈이 찢어진 버선발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를 본 조태구가 하인에게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꽃신 하나를 구해 오너라."

   가마에서 조태구에게 비단 꽃신 한 켤레를 건내받은 옥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게도 태구 도련님처럼 듬직한 오라비가 있으면 참으로 좋으련만......'

   옥정의 오라비 희재는 서른의 나이에도 장가들지 않고, 하는 일 없이 양반집 도령들과 어울려 기생집이나 찾아다니는 한량이었다. 희재가 비록 누이동생 옥정을 아끼는 마음이 각별하기는 해도 한량인 오라비를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느새 옥정을 태운 가마가 조사석의 집에 당도했다. 가마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십여명의 하인들이 몰려왔다.

   "아버님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셨느냐?"

   조태구의 물음에 하인 하나가 대답했다.

   "대감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셨나이다. 하온데, 도련님, 마님께서 부르시옵니다."

   조태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눈으로 옥정을 가리키며 하인들에게 명했다.

   "옥정 낭자를 객실로 인도하거라."

   하인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펴보며 주저했다. 옥정을 집안에 들인 것을 권씨가 알면 호된 꾸지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대감께서 아니 계시오니, 이만 떠날까 하옵니다."

   옥정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 하자, 조태구가 앞을 막아섰다.

   "아버님의 분부시니,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하오나......"

   "뭣들 하느냐! 어서 옥정 낭자를 객실로 인도하거라!"

   조태구의 다그침에 하인들이 재촉하자 옥정은 어쩔 수 없이 하인들을 따라 객실로 향했다.

   객실에 들어앉은 옥정은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권씨가 들이닥쳐 축객령을 내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읺아 권씨가 들어왔다. 아들을 친정에 심부름을 보내고 곧장 객실로 온 권씨는 싸늘한 눈초리로 옥정을 노려보며 호통쳤다.

   "천출의 여식이 어찌 감히 대감집 객실에 앉아있는 게냐? 당장 나가지 못할까?"

   권씨의 모욕적인 언사에 옥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참아야 한다. 어머님과 백부님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지 아니한가!'

   옥정은 분노를 억누르며 권씨에게 큰절을 올리고 객실을 나왔다. 그때 권씨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한 것이 예의는 아는구나!"

   옥정이 분노에 찬 발걸음으로 대문을 나서려 하자 하인들이 만류했다.

   "도령께서 낭자가 떠난 것을 아시면 우리가 무슨 면목으로 도령을 뵙겠소? 차라리 뒷마당 정자에서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소?"

   일가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이라 자존심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옥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하인들을 따라 뒷마당 정자로 갔다.

   정자에 앉아 몇 시진을 보낸 저녁 무렵, 조사석이 윤씨와 철영을 데리고 나타났다. 철영은 포졸들에게 흠씬 얻어맞아 얼굴 여기저기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윤씨가 눈물을 쏟으며 옥정을 와락 껴안았다.

   "옥정아,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소녀는 괜찮사옵니다."

   "몸이라도 성하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한숨을 돌린 윤씨는 아들 희재가 걱정되어 대뜸 물었다.

   "희재도 무사한 것이냐?"

   "잠시 장안을 떠나있다 돌아오기로 하였으니 심려치 마소서."

   옥정은 조사석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온통 만신창이가 되어 힘겹게 서있는 철영에게 다가갔다.

   "철영아, 네가 우리 때문에...... 몸은 괜찮은 것이냐?"

   옥정의 눈에 이슬같은 눈물이 맺혔다. 철영은 옥정이 자신을 염려하여 눈물을 보이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소인은 강골이라 끄떡없사옵니다. 심려하지 마옵소서."

   이때 조사석이 옥정에게 말했다.

   "내 너희 모녀에게 할 말이 있으니 따라오너라."

   옥정과 윤씨를 객실로 데려온 조사석은 천천히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포도청에 너희 가족이 우리 가문의 사람이라 일러두었으니, 이젠 근심하지 말거라." 

   윤씨는 조사석에게 큰절을 했다.

   "쇤네 가족을 구해주신 대감의 크신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그대가 장씨 일가의 안주인이 된지가 30여 년이 되었거늘 쇤네가 뭔가."

   윤씨는 문득 30여 년 전 조사석과 밀회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라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조사석도 그때의 생각이 떠올라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장현의 일은 내 손 밖의 일이라 내일 대왕대비마마께 아뢰어야 할 터인데......"

   역모에 연루된 장현을 구하는 것은 조사석의 손을 벗어난 일이었다. 대왕대비가 몸소 나선다 해도 장현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역적의 무리라는 오명을 쓴 장현을 구하지 못한다면, 옥정 역시 역적의 가문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조사석이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자, 윤씨가 푸념어린 어조로 말했다.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길 따름이옵니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평생을 정직하게 살아오신 우리 시아주버님을 버리지 않으리라 믿사옵니다."

   "마땅히 그리될 걸세."

   윤씨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았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조사석이 입을 열었다. 

   "의지할 곳은 있는가?"

   "소첩의 남동생이 이 근방에 있사오니, 잠시 의지할까 하옵니다."

   조사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롱에서 금덩이를 꺼내었다.

   "이걸 받게나."

   제법 큰 집을 사고도 남을 만한 값의 금덩이였다.

   "어찌......"

   "옥정을 시집보내려면 종잣돈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옥정을 위해서라도 받아 두게."

   "대감의 은혜에 감읍하기 그지없사오나 받을 수 없나이다."

   금덩이를 거절한 윤씨는 마음이 불편해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하오면 우리 모녀는 이만 떠날까 하옵니다."

   조사석은 담배대를 입에 문 채 한숨을 내쉬고는 그윽한 눈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윤씨를 바라보았다. 조사석은 자신이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윤씨의 눈물을 보자 가슴이 미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했다.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 도움을 청하게나."


   윤씨의 유일한 피붙이 남동생 윤정석은 윤씨가 장경의 첩실이 된 이래 30여 년 째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역모에 연루된 부모님을 여의고 윤씨와 함께 조사석 처가의 종이 되어 잡일만 하여 농사를 지을 줄도 모르고 천성도 게으른 탓이었다.

   이때 윤정석은 장현의 가문이 역모에 연루되어 포졸에게 추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조사석 집에 사람을 보내 윤씨의 소식을 알아보고 있던 차였다.

   '누님의 시댁이 풍비박산이 되었으니 이제 어찌 사나? 헌데 누님께서는 무사하실까?'

   윤정석이 소식을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윤씨가 옥정, 철영과 함께 당도했다.

   "누님,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은 윤씨는 서러움이 복받쳐 통곡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윤씨의 통곡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윤정석에게 옥정이 인사를 올린 후 말했다.

   "서인들의 모함으로 백부님께서 역모에 연루되어 백부님을 위시한 온 일가 사람들이 모두 포도청의 포졸들에게 추포되었고, 오직 우리 가족만 무사했을 뿐이옵니다."

   옥정 역시 서러움이 복받쳐 말끝을 흐리며 흐느꼈다.

   "우리 가족이라도 무사하였으니 천만다행이구나!"

   윤정석은 흐느끼며 우는 옥정의 어깨를 토닥여준 후 윤씨에게 말했다.

   "누님, 조대감께서 계시니 너무 심려치 마소."

   윤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눈물을 닦고 나서 집안을 둘러보니 곳간이 텅 빈 것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다.

   '내 동생이 사람은 좋으나 천하의 백수로 무능하기 짝이 없으니 이제 어찌 살까. 장씨 가문의 정실인 내가 예전처럼 남의 집 종노릇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윤씨의 눈길이 텅 빈 곳간에 머물자 윤정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매형께 곡식을 빌릴 참이었는데......"

   윤씨는 망연자실하여 탄식했다.

   "이 누이가 하나밖에 없는 내 아우의 곤궁함도 모르고 살았구나!"

   그제서야 텅 빈 곳간에 눈길이 멈춘 옥정은 윤정석이 자신의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음을 알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외삼촌께서 이리도 곤궁하게 사시다니! 한량인 오라버니를 의지할 수도 없는 일이니 이제 우리 모녀는 어찌 살까? 혼처나 제대로 구할 수 있을지......'

   이날따라 밤바람이 차가워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윤정석이 윤씨와 옥정 모녀에게 내어준 처소는 온돌방이었으나 장작이 없어 불을 지필 수 없었다. 옥정은 몸이 허약한 윤씨가 감기라도 들까 걱정되었다.

   '어머님이 걱정이구나! 따뜻한 이부자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따뜻했던 내 방이 그립구나! 백부님은 옥에서 잘 지내고 계실까? 오라버니께서는 어디서 밤을 보내고 있을까?'

   옥정은 걱정으로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제 온종일 식사도 하지 못하고 시달려 몹시 배가 고파진 옥정은 뒷산에 도토리라도 주울 생각으로 새벽부터 일어나 대문을 나섰다.

   "아씨!"

  철영이 절뚝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철영 역시 밤새 잠이 오지 않아 온통 멍든 몸을 뒤척이고 있던 중 문틈 사이로 옥정이 대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따라나선 것이었다.

   "여인이 혼자 새벽길을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쇤네도 따라가겠사옵니다. 어디를 가시려 하옵니까?"

   "곳간이 비어 도토리라도 주울까 한다. 몸도 성치 아니한데 괜찮겠느냐?"

   철영은 괜찮다는 듯이 두 팔을 번쩍 들어보였다.

   "쇤네 강골이라 끄덕없사옵니다."

   "허면 따라오너라."

   때마침 보릿고개인 3월이라 뒷산 어디에도 도토리를 찾을 수 없었다. 옥정은 다리에 맥이 풀렸다. 철영이 말했다.

    "도토리는 이미 사람들이 주워간 모양이니, 쇤네가 도끼를 가져와 장작이라도 해 가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순간 옥정은 어제 급히 도망쳐 나온 종백부 장현의 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문득 장현의 집에 남겨 둔 자신의 물건들이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이 어찌 되었는지 가봐야겠다." 

   옥정은 기대에 찬 발걸음으로 어제까지도 살았던 장현의 집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페허가 된 장현의 집은 쓸 만한 나무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마당과 정원에 심어져 있던 나무들은 밑둥만 남긴 채 베어 없었고, 문짝마저 모조리 뜯어가 버렸다. 옥정은 넋이 나간 얼굴로 폐허가 된 집을 두리번거렸다. 철영이 이를 갈며 한마디 내뱉었다.

    "지독한 놈들......"

    "입조심하거라."

   옥정과 철영이 인기척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조태구가 하인 몇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옥정이 고개를 숙여 조태구에게 인사를 했다.

   "도련님이 이곳에 어찌......"

   "궁금하여 와 봤느니라."

   옥정은 집안 곳곳을 둘러보며 탄식했다. 조태구가 연민의 눈으로 옥정을 보며 말했다.

   "실망이 크겠구나. 반드시 네 원수를 갚아주마. 네 백부를 모함한 자들을 발본색원하여 피눈물이 나게 만들겠다. 내 약속하마."

   "소녀, 다만 백부님을 구하고 어머님을 잘 봉양하고 싶을 따름이옵니다."

   옥정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포도청의 포졸들이 포도대장의 허락없이 조선 최고의 거부인 장현의 집안을 멋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옥정은 조심스럽게 조태구에게 말했다.

   "저들이 우리 가문의 집을 이처럼 쑥대밭으로 만든 것은, 아마도 포도대장의 지시가 있었던 것이 아닌지요."

   역적으로 몰린 장현의 가산을 적몰하라는 숙종의 명이 떨어져 있었다. 조사석이 윤씨를 구하러 포도청에 갔을 때 들은 사실로 조태구도 알고 있었지만 옥정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글쎄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조태구가 말끝을 흐리자, 옥정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 혹여 이번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면 말씀해 주소서."

   "이미 아버님께서 대왕대비마마께 네 가문의 무고함을 아뢰러 가셨으니, 심려치 말거라."

   이때 멀리서 날카로운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는 놈들이냐?"

   포도청의 포졸 몇이 몽둥이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뭐하는 놈들이기에 이른 시각에 역적의 집에 있는 게냐?"

   포졸의 호통이 끝나기도 전에 조태구의 하인 하나가 눈을 치켜뜨며 꾸짖었다.

    "무엄하다! 어찌 감히 이조판서 대감의 장자이신 도령께 이리도 무례한 게냐?"

   왕실 최고의 어른인 대왕대비는 자식이 없어 이조판서인 사촌동생 조사석의 아들 조태구를 친아들처럼 총애했다. 조태구의 신분을 알게 된 포졸들은 굽실거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지체 높은 도령을 몰라 뵌 소인들의 무례를 용서하소서."

    조태구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거든 썩 물러가거라."

    포졸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그중 한명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하온데 이 집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포도대장 나리의 명이 떨어졌사오니......"

    "알겠다. 이만 나가보마."

    옥정과 조태구가 일행과 함께 대문을 나섰다. 대문 바로 앞에는 비단으로 수놓은 수려한 가마가 놓여 있었다.

    "가마에 타거라. 내 너희 집에 볼 일이 있으니 함께 가자꾸나."

    조태구의 말에 옥정은 고개를 흔들었다.

    "미천한 소녀가 어찌 비단 가마에 탈 수 있겠나이까?"

    "타거라. 너는 중인의 가문이 아니냐? 중인은 비단 가마에 탈 수 있느니라."

    옥정은 단 한 번도 비단 가마에 탄 적이 없었다. 옥정의 종백부 장현이 검소한데다 양반이 아닌 중인 가문의 자식이 비단 가마를 타는 것은 풍속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옥정은 거듭되는 조태구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가마에 올랐다. 난생 처음 비단 가마를 탄 옥정의 가슴이 어쩐지 설래었다.

   '이 가마가 나를 신부로 데려가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옥정은 명망 있는 가문의 집에 정실로 시집가는 것이 꿈이었다. 양반이 아닌 중인이라도 아버지 장경처럼 인격과 학식이 뛰어난 사내라면 얼마든지 시집갈 용의가 있지만, 옥정이 기대했던 수준의 혼처는 여태껏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가마가 윤정석의 집에 당도했다. 비단 가마에서 나오는 옥정을 본 윤정석은어안이 벙벙하였으나 조태구를 보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도령께서 소인의 누추한 거처에 어인 일이시옵니까?"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 왔네." 

    윤씨 남매는 본래 중인의 가문이었으나 역관인 아버지 윤성립이 역모의 누명을 쓴 소현세자비 강빈을 옹호하다가 처형당하여 가산이 몰수되고 온 가족이 천인 신분이 되었다. 다행히도 윤씨의 자식 희재와 옥정은 숭록대부의 벼슬을 지낸 아버지 장경 덕분에 중인으로 태어났는데, 이 당시 벼슬아치에 한해 자식의 신분이 아버지를 따르는 종부법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정석의 처소로 들어간 조태구는 품속에서 금덩이를 꺼내었다. 

   "받아두게나. 아버님께서 자네의 누이를 생각해서 주시는 것일세."

   윤정석은 잠시 머뭇거리다 금덩이를 냉큼 받았다.

   "대감께서 누님께 큰 은혜를 배푸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여차하면 조사석에게 손을 벌릴 참이었는데, 조사석의 아들이 금덩이를 주니 체면을 살필 여지가 없었다. 다만 윤씨의 강직한 성격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다.

   "하온데 누님이 알고 야단을 치면 어찌 하오리까?"

   "아버님께서 자네에게 준 것으로 하면 어찌 하지 못할 걸세."

   윤정석은 그제야 안심되는 듯 함박 미소를 지었다.

   "옥정을 잘 부탁하네."

   조태구는 묘한 여운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경신년(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의 서자 허견이 숙종의 5촌 복선군을 왕위에 추대하려는 역적모의를 했다는 고발이 들어와 남인이 집권하고 있던 조정이 발칵 뒤집혀 서인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경신대출척이라는 이 환국으로, 영의정 허적, 좌의정 권대운, 우의정 민희 등 남인 출신의 조정 대신들이 대거 파직되고, 김수항, 김석주, 민정중을 비롯한 서인들이 조정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남인들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경신대출척이 일어났지만, 어떤 역적모의도 없었다. 허적의 서자 허견이 친분이 있는 복선군과 술을 마시다 취중에 말한 것이 화근이 되어 고변을 당한 것이었다.

   "주상께서 몸이 허약하시고 형제도 아들도 없으니, 만일 주상께서 승하하시면 대감께서 유력한 왕위 계승자가 될 터인데, 그때 서인들이 임성군을 왕위에 추대한다면, 이 몸이 병력을 움직여 대감을 왕위에 추대하겠소."

   임성군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의 차남으로 서인들이 숙종의 승하 시 임성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어 술김에 내뱉은 허견의 말이 숙종의 귀에까지 들려 효종 때부터 남인들의 돈줄 역할을 해왔던 장현까지 화가 미쳤던 것이다.

   이로 인해 허견은 능지처참당했고, 복선군은 물론 그의 형 복창군과 아우 복평군까지 역모에 연루되어 절도에 귀양 보내 위리안치(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가시로 울타리를 쳐 가두는 일) 중에 사형에 처해졌다. 뿐만 아니라 허견의 아버지 허적이 아들의 죄를 알고도 숨겼다는 죄목으로 해남에 귀양살이 중 사형을 당했고, 허견을 두둔했던 수십의 남인들도 사형을 당했다. 왕실과 조정에 이토록 처절한 피바람이 몰아친 것은 어영대장 김익훈을 비롯한 일부 서인들이 역적 소탕이라는 공을 세우기 위해 허견을 비롯한 남인들이 반정을 일으켜 숙종을 폐하고 복선군을 왕위에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했다고 모함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조선팔도에 큰 가뭄이 들어 기근으로 굶주린 양인들이 자신의 딸을 상공업 등으로 부를 축적한 천인의 집에 시집보내는 일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조정의 정권을 잡고 있는 서인의 영수 영의정 김수항은 숙종에게 종모법(자식의 신분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는 신분법)을 시행할 것을 주청 드렸다.

   "가뭄으로 곤궁해진 양인의 여식이 천인의 사내와 교혼하는 일이 허다한데, 일천즉천(부모 중에 하나만 천인이라도 자식이 천인이 되도록 정한 조선시대의 신분법)의 법으로 인하여 이들의 자식이 모두 천인의 신분이 되니, 이 나라의 군역과 조세를 맡은 양인의 수가 계속 줄어드는 실정이옵니다. 이 같은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서 선대왕 때 시행되었던 종모법을 다시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태종이 종부법(자식의 신분이 아버지를 따르도록 정한 신분법)을 시행한 이래 여태껏 왕족과 대신들의 자식에 한해 종부법이 시행되고 있어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인 숙종은 선뜻 결정할 수 없었다. 숙종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김수항에게 물었다.

   "천인의 여식을 첩으로 둔 대신들이 반발하지 않겠는가?"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에 한해서는 종부법을 계속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종친과 대신들에 한해서만 종부법을 시행한다면, 천인을 아내로 둔 양인들의 반발은 어찌 무마할 것인가?"

   예상치 못한 숙종의 물음에 김수항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백성들이 어찌 나라에서 시행하는 법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겠나이까?"

   "나라에서 시행하는 법이 불공평하다면 과연 백성들이 진심으로 승복하겠는가?"

   "종모법은 선대왕께서 만드신 법이온데 백성들이 어찌 불평할 수 있겠나이까? 바라건대, 종모법 시행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좀 더 숙고한 연후에 결정할 것이다. 이만 물러가거라."

   김수항이 대전을 떠나자, 숙종은 인경왕후의 처소로 발걸음을 하였다.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여식인 인경왕후는 열 살에 세자비로 간택되어 4년 후인 열네 살에 곤위(중전의 지위)에 올라 약관인 지금까지 국모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인경왕후는 자애로운 얼굴로 숙종을 맞았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어질고 현숙한 인경왕후는, 엄격한 어머니 대비 이외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는 숙종이 마음을 털어놓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숙종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영의정 김수항이 종모법 시행을 주청하였소. 그러면서도 종친과 대신들에 한해서는 종부법을 계속 시행하자 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려."

   "나라에서 종모법을 시행한다면 대신들 또한 종모법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나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으나, 천인의 여식을 첩으로 들인 대신들의 반발을 어찌 무마할지 그것이 걱정이오."

   인경왕후는 종숙부 김익훈이 얼마 전 천인의 여식을 첩으로 들인 사실이 떠오르자, 김익훈의 원망을 들을까봐 난처한 표정을 짓다 숙고 끝에 말했다.

   "이미 천인의 여식을 첩실로 맞아들인 대신들에 한해서만 그대로 종부법을 따르도록 예외를 두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구려."

   숙종이 교지를 써 종모법 시행령을 내리자, 이내 전국 방방곡곡에 종모법을 시행한다는 방이 나붙었다.


   옥정이 윤정석의 집에 정착한지도 어느새 한 달여, 윤씨와 옥정 모녀는 바느질과 길쌈질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윤정석이 그간 모아둔 재물이 넉넉하다며 호위호식하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백수인 윤정석의 집에서 무위도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윤씨와 함께 바느질을 하던 옥정은 이날따라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차 하는 순간 바늘이 옥정의 검지손가락을 찔러왔다. 옥정이 바느질을 멈추자 윤씨가 측은한 눈빛으로 옥정을 보며 말했다.

   "또 바늘에 찔린 것이냐?"

   "아니옵니다. 잠시 졸음이 와서......"

   태연한 척하는 옥정의 얼굴에 고통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바느질감을 방바닥에 내려놓은 윤씨는 한손에 바늘을 쥔 채 옥정의 손가락을 살폈다. 새파랗게 질린 옥정의 검지를 보자 윤씨는 가슴이 미어졌다.

   "내 조심하라 그리도 일렀거늘...... 오늘은 일감이 그리 많지 않으니, 너는 좀 쉬거라."

   이때 갑자기 대문이 덜컥 열리더니, 윤정석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어 들어왔다.

   "누님, 이거 큰일 났습니다. 포졸들이 방을 붙이며 공고하기를, 벼슬아치들에 한해 시행된 종부법이 폐지되고, 양반, 중인 가릴 것 없이 모두 종모법이 적용된다 하더이다. 이제 우리 희재와 옥정도 종모법이 적용될 터인데, 어찌 하오리까?"

   "그게 참말이냐?"

   "관청 나리께 확인한 사실이옵니다."

   옥정은 대체 종모법이 무엇이길래 외삼촌이 이리도 야단법석을 떠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갑자기 윤씨가 통곡했다.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이냐!"

   옥정의 아버지 장경은 역관으로 종1품 숭록대부의 벼슬에 올라 윤씨가 천인임에도 희재와 옥정이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중인이 된 것인데, 달포 전 장현이 역모에 연루돼  장씨 일가에 하사된 벼슬이 모두 삭탈된 데 이어 종모법이 시행되는 바람에 이 같은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옥정이 의아하여 물었다.

   "종모법이 대체 무엇이옵니까?"

   통곡하던 윤씨는 옥정을 껴안으며 절규했다.

   "옥정아, 그러게 진작 시집갈 것이지......"

   옥정은 이제야 종모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오면, 소녀와 오라버니 모두 어머님의 신분을 따르게 되는 것이옵니까?"

   "그렇단다. 창졸간에 너와 네 오라비가 천출이 되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이냐?"

   옥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지만 마음을 진정시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백부님께서 역적으로 몰리셨을 때,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옵니다. 어차피 우리 가문은 역적으로 몰려 천출과 별반 차이가 없지 않사옵니까?"

   "모르는 소리 말거라. 네가 무얼 안다고......"

   "어머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였으니,너무 낙담하지마세요. 조대감께서 우리 모녀를 버리지 아니할 터인즉, 무슨 좋은 수가 생기지 않겠사옵니까?"

   옥정이 윤씨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어머님, 소녀에겐 어머님이 가장 소중하옵니다. 부디 마음을 편히 하소서. 소녀 반드시 좋은 혼처를 구해 어머님께 효도하겠사옵니다."

   윤씨는 옥정을 대견한 듯 바라보다 껴안았다.

   "그래, 네가 좋은 혼처를 구하기만 하면 이 어미가 무슨 걱정이겠느냐."



추천 글 : 장옥정, 조정우 장편소설 하일라이트 (필자의 역사소설 출간!)

리뷰 글 : '악녀와 희생양', 그 식상한 잣대 <장옥정> (파레토최적님 글)

          : 한 여인으로 사랑한 것도 죄인가요 장옥정 : 조정우 (파란토끼13호님)

          : '장옥정' 현대적 감각으로 장희빈을 재조명하다 (너돌양님 리뷰)

재미있으셨다면 추천(연녹색 정사각형 버튼과 손가락 모양 버튼)을 눌러 주세요

조정우 장편소설 장옥정 출간! 판매처 배너 클릭

Posted by labyrint



장옥정

저자
조정우 지음
출판사
청어 | 2013-04-0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어 너와 영원히 함...
가격비교



  이 소설은 단순히 한 여인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소설이 아니라 그녀가 입궁하여 궁궐에서 보낸 20여 년 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대소설로, 장옥정과 인현왕후,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숙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장옥정, 하이라이트


    숙종이 후원을 한가롭게 거닐고 있는데, 궁인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걸어오다 숙종을 보더니 황급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인사를 올리는 모습이 어설픈 것이 입궁한지 얼마 되지 않은 궁인인 듯싶었다. 고개를 숙인 목덜미 사이로 얼핏 보이는 궁인의 자태가 제법 고와 숙종은 호기심이 생겼다.

   "고개를 들라."

  순간 백옥처럼 하얀 궁인의 얼굴이 숙종의 시야에 들어왔다. 

   "전하를 뵙나이다."

  고개를 수그린 채 몹시 수줍어하며 인사를 올리는 궁인의 자태는 숙종이 이제껏 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웠다.

   "참으로 아름다운지고!"

  숙종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오자 부끄러워 얼굴이 붉게 물든 궁인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를 어여삐 여겨 주시오니, 황공하기 그지없나이다."

  "이름이 무엇이냐?"

  "소녀, 옥정이라 하옵니다."


   옥정이 내전에 들어서자순간 지극히 아름답고 기품있는 인현왕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오래 전 가례식에서 열다섯의 앳된 얼굴이었던 인현왕후는 이제 약관의 나이로 그때보다 한층 성숙하고 아름다워 옥정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옥정은 멍하니 서 있다가 인현왕후와 눈이 마주치자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올렸다.

   "소녀 장상궁중전마마께 인사 올리나이다."

   인현왕후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진작 너를 부르려 했으나한해 두해 늦어지더니 어언 다섯 해가 지났구나그간 마음고생이 적지 아니하였을 것이나 이제 이렇게 입궁하였으니옛일은 잊고 마음을 추스려 전하를 잘 모시기 바란다."

   "중전마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토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예전보다 훨씬 아름다워진 인현왕후의 자태를 보자옥정은 마음이 심난했다.

   '중전마마께서 예전보다 더욱 아름다워지셨구나뿐만 아니라 나보다 여덟살이나 어리시니 전하의 총애가 중전마마께 기울까 참으로 염려되는구나!'

   상대의 외모에 감탄한 것은 옥정 뿐만이 아니었다옥정을 처음 보는 인현왕후 역시 감탄하며 말했다.

  "자태가 곱구나!"

  "황공하옵니다."


   "공주주저하시지 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선대왕이신 할바마마께서 승하하시기 수개월 전에 사냥을 하실 때 여우를 잡으셨사온데여우가 죽기 전에 발버둥치고 발악하여 할바마마께서 크게 놀라셨다 하옵니다바로 그날 밤 할바마마께서 기이한 꿈을 꾸셨는데여우가 꿈에 나타나 '나는 백년 묵은 여우라 얼마 후면 사람이 될 터인데너의 화살을 맞고 죽었으니어찌 이 한을 풀지 않겠느냐내 반드시 사람으로 환생하여 너의 후손에게 복수하리라'말하고 사라졌다 하옵니다할바마마께서는 꿈이 너무도 생시같아 어마마마께 말씀하셨다 하온데그때로부터 불과 넉달 후에 할바마마께서 갑작스러운 변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하옵니다참으로 기괴한 일이 아니옵니까?"

   "과연 기괴한 일입니다허나 그것이 옥정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후 어마마마께서 사람을 시켜 확인하신 바옥정은 할바마마께서 그 여우를 사냥한 지 아홉달 후에 태어났다 하옵니다이 또한 기괴한 일이 아니옵니까?"

   당시민간에는 백 년 묵은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전설이 있어 대비로부터 효종의 꿈 이야기를 들은 명안공주는 옥정이 백 년 묵은 여우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인현왕후는 이러한 명안공주의 의중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참으로 기괴하기 짝이 없소만공주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 뿐만이 아니옵니다어마마마께서도 변고를 당하시기 전에 참으로 기괴한 꿈을 꾸셨다 하시온데꿈에서 옥정이 한 맺힌 눈으로 노려보다 별안간 여우로 둔갑하여 덤벼들어 어마마마께서 몹시 놀라 깨셨으나 꿈이 생시처럼 분명하여 기이하게 생각하시고 소녀에게 말씀하셨사옵니다하온데 어마마마께서는 그 꿈을 꾸신 후 달포도 아니되어 승하하셨사오니이 또한 참으로 기괴한 일이 아니옵니까?"


   이 시각 박태보는 죄인의 신분으로 함거에 실려 아내 이씨와 함께 유배지인 진도로 가고 있었는데인현왕후가 폐출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탄식하며 대성통곡하였다.

   "중전마마중전마마의 폐출을 막지 못한 소신의 불충을 용서하여 주소서중전마마......"

   박태보는 충격으로 혼절했다바로 그때서른 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나는 듯이 달려오더니 고문으로 살갗이 벗겨지고 피투성이인 박태보의 손을 잡았다.

   "나리쇤네를 기억하시옵니까아랑이옵니다한평생 나리만 사모해온 아랑이옵니다눈을 뜨소서쇤네를 한번만 봐주옵소서."

   여인의 목소리가 어찌나 애처로운지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박태보의 부인 이씨를 바라볼 뿐이었다박태보의 하인들이 어찌 할지 눈짓으로 묻자 이씨가 입을 열었다.

   "내버려 두거라."

   여인은 박태보의 벗인 이종엽의 하녀 아랑으로십년 전 심부름왔다가 신선처럼 외모가 수려한 박태보에게 반해 진심을 털어놓은 후 하녀로 받아달라 간청했었는데그때 박태보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 여인이 자신을 잊을까 하여 십년 후에 다시 찾아오라 말했었다그 일이 있은 후 박태보는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아랑은 박태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여지껏 기다려 오다가 박태보의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박태보는 옛일을 떠올리며 그윽한 눈으로 아랑을 바라보다가 이씨에게 들릴 듯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이 여인이 의리를 아는 듯하니하녀로 들이는 것이 어떻겠소......"

   박태보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변함없이 사모하는 아랑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던 것이다.

   이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아랑이 박태보와 이씨에게 큰절을 했다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떨리는 손으로 박태보의 왼손을 다시 잡은 아랑은 행복해 보였다혹독한 화형으로 얼굴이 상처와 흉터 투성이가 되어 신선과도 같던 수려한 모습을 완전히 잃은 박태보를 아랑은 예전보다 더욱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순간 박태보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감돌았다이씨는 가만히 박태보의 오른손을 잡았다박태보는 두 여인에게 손을 잡힌 채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은 후 세상을 떠났다.

   "중전마마를 부탁하오......"

   박태보는 자식이 없음에도 첩실을 두지 않아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언젠가 이씨가 첩실을 들이라 권유했을 때 박태보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될 말씀이오첫째는 한 여인만 섬기는 장부로서 지조를 지키기 위함이요둘째는 자식을 서자로 만들어 한을 남기지 아니하기 위함이니더는 말씀을 말아주시오."

   만고의 충신이자 천하에 둘도 없는 애처가였던 박태보의 부음 소식에 온 나라의 백성들이 땅을 치며 통곡했다.


   황금 화관을 쓰고 붉은 대례복을 입고 어전에 오른 옥정은 책봉식에 참석한 하객들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이날따라 더 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옥정을 숙종은 뿌듯한 눈길로 바라보았다승지가 어전에 올라 중전 책봉문을 읽었다.

   "왕은 이르노라하늘이 태양과 달을 비추어 천지를 돌보고 덕으로 세상을 다스림과 같이 임금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진 왕후의 보필이 필요하매덕이 후궁 중에 으뜸인 장씨를 과인의 배필로 맞을까 하니 절차에 따라 책봉식을 거행하라."

   조상궁이 옥정에게 중전의 인장이 있는 옥책함을 건내자 승지가 새 중전이 책봉되었음을 선포했다.

   -중략-

   대신들의 하례를 차례로 받던 중 옥정은 문득 조사석이 책봉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조대감께서 나를 중전으로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일까아니다나를 아껴오신 조대감께서 그러실 리가 있겠는가!'

   순간 옥정의 시야에 조태구가 들어왔다옥정이 입궁한 후 처음 보는 것이니거의 10년 만의 재회였다조태구는 멋쩍은 듯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하례를 올렸다.

   "중전마마곤위에 오르심을 감축드리나이다천귀와 천복을 누리시고 만수무강하소서!"

   조태구의 하례 인사 한마디 한마디에 충심이 느껴졌다조사석이 서인의 편에 가담했는지 노심초사하던 옥정은 이러한 조태구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옥정은 조태구가 자신과의 의리를 버리지 않는 한 조사석 또한 자신의 어머니 윤씨와의 의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중전 책봉식이 끝난 후 집으로 향하는 조태구의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아버님께서 중전마마의 책봉식에 오시지 아니하신 것은 필시 폐비 마마와의 의리 때문이 아니겠는가나 또한 중전마마와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으니 이를 어찌하랴!'

   집에 도착한 조태구는 곧장 조사석의 처소를 찾아갔다조사석은 담뱃대를 문 채 말이 없었다조태구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버님어찌하여 중전마마의 책봉식에 오시지 아니하셨나이까?"

   조사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아비의 마음속에 있는 중전마마는 오직 한분이시니라."

   조사석의 말에 조태구는 충격으로 멍하니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하오면아버님께서는 작금의 중전마마를 인정하지 아니하시렵니까?"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이 아비에게 중전마마는 오직 한분 뿐이신 것을......"

   "하오나아버님께서는 작금의 중전마마를 친딸처럼 아끼지 아니하셨나이까?"

   조사석은 눈물을 글썽이는 조태구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딸이 아무리 귀하다 한들어찌 어미와의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느냐?"

   "하오면소자는 어찌해야 하옵니까소자 또한 작금의 중전마마와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나이다."

   애타는 목소리로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는 조태구에게 조사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때로는 아들의 길이 아비와 다를 수도 있는 법네 뜻대로 하거라."

   "아버님......"

   조태구는 가슴이 복받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추천 글 : 장옥정, 조정우 장편소설 미리보기  (필자의 신간소설 출간!)

재미있으셨다면 추천(연녹색 정사각형 버튼과 손가락 모양 버튼)을 눌러 주세요

 조정우 장편소설 장옥정 출간! 판매처 배너 클릭

Posted by labyrint

선덕여왕 2화

창작집 2013. 3. 10. 10:00

  


 선덕여왕 2화


 
당태종은 문득 무왕이 어떻게 선화공주를 설득했는지 궁금해졌다. 
 "선화공주는 순순히 무왕을 따라갔는가?"
 "절에 유폐되었던 선화공주는 호위 병사들을 따돌려 탈출한 후에 무왕과 함께 신라를 떠났다 하옵니다."
 "그가 백제의 왕자인줄 모르고 따라갔는가?"
 "금지옥엽인 공주가 어찌 필부를 따라가겠사옵니까? 무왕이 자신의 신분을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옵니다."
 "공주가 사라졌다면 전국 각처를 이 잡듯 검문하였을 터인데, 어찌 신라를 빠져나갈 수 있었는고?"
 "소신이 추측컨대, 진평왕은 서동이 무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육로만 봉쇄하였으니, 무왕은 배를 타고 백제로 돌아간 듯합니다."

 당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추측이 맞을 걸세. 백제는 예로부터 항해술이 뛰어났지. 허나, 미녀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다니...... 무왕도 보통이 아닐세."

 "무왕으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옵니다."
 "어째서인고?"
 "무왕은 당시 백제의 태자가 아니었사옵니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행동이 필요했을 것이옵니다. 무왕이 백제로 돌아간 얼마 후에 백제의 법왕이 승하하여 무왕은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선화공주의 도움이 컸다 하옵니다."


 당태종은 선화공주가 무왕을 어떻게 도왔는지 궁금하여 물었다.
 "무왕은 어찌 왕이 되었는고?"

 "소신이 아는 바로는 무왕은 탐라국으로 가서 탐라왕에게 자신이 즉위한다면 탐라국을 독립시켜 줄테니 도와달라고 했고, 진평왕에게는 자신이 왕이 된다면 탐라국을 신라에게 줄 뿐만 아니라 신라를 침범하지 않을테니 도와달라고 했다고 하옵니다. 탐라왕은 무왕의 말을 믿고 도와주었고, 진평왕은 기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무왕을 사위로 인정한 후에 막대한 양의 황금을 보내 무왕을 도왔다고 하옵니다."
 "하하하...... 딸을 빼았긴 진평왕의 마음이 오죽했겠나. 딸이 이미 무왕과 혼인하였으니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걸세. 그래, 그 후에 어떻게 되었나?"
 "무왕은 신라로부터 막대한 황금을 받았지만, 산에서 발견한 것으로 소문낸 후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민심을 얻었다고 합니다. 백제의 법왕이 죽자 백제의 민심은 무왕에게 기울어져 백제의 귀족과 중신들은 무왕을 왕으로 맞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하옵니다. 왕위에 오른 무왕은 약조대로 탐라국을 독립시켰으나, 탐라국은 그 후에도 백제를 상국으로 섬겨 조공을 바쳤으니, 눈속임에 불과한 것이옵니다. 이후 무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탐라국이 독립하였으니, 약조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며 양해하여 달라 하였다 하옵니다."
 "진평왕은 어찌 하였는고?"
 "진평왕은 탐라국을 치려했으나, 신라의 중신들은 신라의 병사들이 해전에 익숙하지 못한 관계로 만류하여 끝내 탐라국을 치지 못했다 하옵니다. 신라의 중신들은 무왕이 신라를 기만한 것이라 하며 진평왕에게 백제를 칠 것을 청하였으나, 진평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옵니다."
 "하하하...... 물에 빠지면 나무조각이라도 잡듯 진평왕은 사위르 믿지 않을 수 없었겠지. 의심이 들어도 사위를 믿고 싶었을게야."
 "진평왕은 사신을 보내 무왕에게 약조대로 빌려간 황금을 돌려달라 하였으나, 무왕은 약조를 이행하지 않았사옵니다. 이에 진평왕은 무왕에게 기만당했다 생각하여 군사를 내어 백제를 쳤사옵니다. 그 이후로 백제와 신라는 다시 앙숙 관계가 되었다 하옵니다."

 당태종은 무왕의 책략에 감탄하였다.

 '무왕...... 범상한 인물이 아니로구나.'


법무법인 강호 (저작권법 전문 법무법인, 대표변호사 조정욱 변호사 블로그)

신재하 문예창작교실 (문창과, 작가지망 수강생 모집, 분당 미금역선릉역)

재미읽으셨다면 추천(연녹색 정사각형 버튼과 손가락 버튼)을 눌러주세요



Posted by labyrint

 

 

   사람이란 저마다 취향이 있고 타입이 있다. 조금 다르면 사랑으로 극복할 수도 있지만, 아주 다르면 헤어지기 십상이라 사귀기 전에 변화하는 작업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발렌타인데이라고 상대방의 취향과 타입을 파악하지 않고, 서로 많이 다른 상태에서 고백하면 만나도 오래가지 못하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또한 여자가 혼자 적극적으면 남자는 쉽게 권태기에 빠져 관계가 쪽나기 쉬우니, 발렌타인데이라고 성급하게 고백하면 안될 것이다.

 

   다음은 발렌타인데이에 성급하게 고백해, 사귀긴 했지만 결국은 헤어진 어느 여학생의 이야기다.

 

 

   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2월의 둘째 월요일에 그녀는 예쁘게 포장한 초콜릿 하나와 카드 한장을 코트의 주머니에 넣은 후에 학교로 발걸음을 향했다. 오늘은 이 땅의 미혼 여성들의 심장을 콩닥콩닥 뛰게 만드는 발렌타인데이라서 그녀의 심장은 콩닥콩닥 뛰다 못해 팔딱팔딱 뛰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그녀는 준비한 초콜릿과 카드를 들고 마치 공주가 왕자님을 만나러 행차하는 것과 같은 당당한 걸음으로 미래에 그녀의 낭군이 점지한 범수를 찾아갔다. 초콜릿과 카드를 쥔 지혜의 손은 사시나무가 바람에 떨리듯이 떨렸다. 지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무거운 입을 열어 말했다.

   "나, 지혜라고 하는데... 혹시 기억하니?
   "당근 기억하지. 현주 친구쟎아."
   "기억해 줘서 정말 고마워."
   "고맙긴... 근데, 왜?"
   "이거..."


   지혜는 범수에게 준비한 초콜릿과 카드를 내밀었다. 범수가 지혜의 손에 든 초콜릿과 카드를 받자, 그녀의 두뺨은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지혜는 새색시처럼 수줍은 표정을 지으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수업 끝나고 잠시 만날 수 있니?"
   "좋아. 어디서 만나지?"
   "정문에서 기다릴께."

   수업이 끝나자 지혜는 학교 정문 앞에서 범수를 기다렸는데, 범수는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지혜에게 다가왔다.

   "많이 기다렸니?"
   "아니, 방금 전에 왔어."
   "지혜야, 나...... 이때까지 너처럼 인기많은 여자한테 카드나 선물을 받은 적이 없었어. 정말 고마워. 덕분에 평생 잊을 수 없는 발렌타인데이가 되었어."

   이렇게 해서 지혜와 범수는 발렌타인데이 커플이 되었다.
   지혜는 범수와 함께 학교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지혜는 공주님이 된 것처럼 마음이 두리둥실 붕 떠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아 자신의 음식을 범수에게 양보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지혜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서 라면을 두개나 삶아 먹었다.



   방과 후 날마다 범수와 데이트를 하며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어느날, 수업이 끝나자 지혜는 범수를 기다렸다. 하지만 범수는 지혜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할 일이 있다고 말한 후 혼자 집으로 가버렸다. 지혜는 1학기 중간 고사 성적표가 나온 며칠 전부터 범수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려졌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성적이 나빠 그런 줄만 알고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범수는 우등생으로 시험에 예민한 학생이었던 것이다. 
   다음날, 지혜는 미술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범수 반에도 미술이 있었다. 지혜는 범수에게 준비성이 없는 여자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친구 현주에게 미술 준비물을 빌렸다. 바로 그때 지혜는 우연하게도 범수가 역시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혜숙과 신나게 떠드는 장면을 목격했다. 지혜는 질투심이 불처럼 일었지만, 혜숙이 범수에게 꼬리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참았다.

   토요일, 지혜는 수업이 끝나자 정문에서 범수를 기다렸지만, 범수는 지혜에게 오늘어디 가야할 곳이 있어 내일 만나자고 말했다. 지혜는 심심해서 혼자서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표를 사려고 매표소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범수가 혜숙이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혜는 화가 나서 달려가 범수의 뺨을 때렸다.
   "어디 가야한다는 곳이 여기였어?"
   지혜에게 뺨을 맞은 범수는 지혜를 한참 노려보다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지혜, 너 공부...... 반에서 뒤에서 10등 안에 든다더라."
   지혜는 혜숙을 노려보았다.
   "혜숙이 너지? 니가 말한거지?"
   "혜숙이가 말해주지 않다고 해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건데, 뭘 그러니? 난 니가 최소한 중간은 되는 줄 알았어. 미안하다."
   지혜는 너무 화가 나서 더 말하고 싶지 않아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일요일, 지혜는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참고서를 펴고 공부를 했다.
   지혜의 어머니는 지혜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아버지에게 말씀하셨다.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여보, 지혜가 남자친구를 사귀더니 철이 들었나 봐요. 아침부터 일어나 공부를 하네요."
   "거봐. 내가 말했지. 남자친구가 생기면 오히려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될거라고. 범수는 부반장이고 반에서 3등이래요.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얼마나 좋아."
   지혜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실, 지혜가 성급했다.

   준비없는 고백은 결국에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성적도 좀 올리고, 범수가 좀 더 자신에게 관심을 끌게 만든 후 고백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좀 더 사전에 준비를 한 후 고백하던지, 아니면 다른 날에 고백하는 것이 발렌타인데이라고 고백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야 할 것이다.


 

최신 글 : 여자가 눈을 낮추어 남자를 만나는 세가지 경우

추천 글 : 장옥정 4화 조정우 역사소설 (새 연재소설!)

재미읽으셨다면 추천(연녹색 정사각형 버튼과 손가락 버튼)을 눌러주세

법무법인 강호 (저작권법 전문 법무법인, 대표변호사 조정욱 변호사 블로그)

신재하 문예창작교실 (문창과, 작가지망 수강생 모집, 분당 미금역, 선릉역)

'창작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옥정, 조정우 시대소설 하일라이트  (0) 2013.07.19
선덕여왕 2화  (0) 2013.03.10
선덕여왕 1화 조정우 역사소설  (0) 2013.01.20
개구장이 소년의 첫사랑 5화  (0) 2012.05.28
개구쟁이 소년의 첫사랑 4화  (0) 2012.05.21
Posted by labyrint

  

  선덕여왕 1화

 

 

 

   신라의 왕족을 상징하는 연꽃문양의 자색 비단옷을 입은 사내가 덕만공주가 거처하는 사량궁을 향해 마치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사량궁을 지키는 호위병사들은 그를 보자, 읍하며 인사하였다. 호위대장 알천이 앞으로 나와 물었다.

   "춘추공께서 이른 아침에 어인 일로 태자마마의 처소에 발걸음하셨나이까?"

   사내는 덕만의 사촌동생이자, 진평왕의 차녀 천명공주의 외아들 춘추였다.

   "태자마마께 급히 아뢸 일이 있소이다."

   "알겠소."

   알천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호위병사들이 문을 열었다. 춘추는 다급하게 궁 안으로 들어갔다.

   덕만공주가 야생화를 그리느라 한참 붓놀림에 심취하고 있을 때, 시녀 서희가 안으로 들어왔다.

   "춘추공께서 오셨나이다. 급한 일인 듯 하옵니다."

   "어서 모시거라."

   "춘추공, 안으로 들어오소서."

   서희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춘추가 안으로 들어왔다.
   "태자마마, 당에서 변고가 일어났사옵니다. 진왕 이세민이 정변을 일으켜, 태자와 세째 왕자를 참살한 후 천자를 별궁에 유폐시켰다 하나이다."

   덕만공주는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진왕은 야심이 큰 자가 아니더냐?"
   잠시 붓을 놓았던 덕만공주는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듯, 다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춘추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덕만공주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하오나......"

   "내, 이미 대책을 세워 두었으니, 너무 심려하지 말거라."

   덕만공주는 잠시 운을 땐 후 춘추에게 물었다.

   "그 외에 다른 할말이 있느냐?"

   춘추는 신라가 상국으로 섬기고 있는 당나라에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림 그리기에 여념이 없는 덕만공주의 태도에 할말을 잃었다.

   "없나이다."

   "허면, 잠시만 기다리거라. 곧 끝내마."

   덕만공주의 손은 야생화를 그리고 있었지만, 머리속으로는 방책을 강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춘추도 차분한 마음으로 방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야생화 그리기를 끝낸 덕만공주가 춘추에게 말했다.

   "네가 들은 사실을 낱낱이 고하거라."
 

   며칠 후, 덕만공주는 진평왕이 누구를 사신으로 보낼지 의견을 묻자,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아바마마, 소녀를 사신단의 대표로 보내주시옵소서. 소녀가 당에 가서 우리 신라와 당의 동맹을 맺고 오겠나이다."
   이에 진평왕은 사신단 대표로 덕만공주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덕만공주가 장안에 도착하자 신라 공주가 천하절색이라는 소문이 장안에 삽시간에 퍼졌다. 당태종은 덕만공주가 천하절색이라는 소문을 듣자 호기심이 생겨 신라 출신인 우영을 불렀다.
   "진평왕은 딸이 모두 몇인고?"
   "진평왕의 딸은 모두 셋이온데, 첫째인 천명공주는 왕족 김용춘과 혼인하였으며, 둘째인 선화공주는 백제의 왕후가 되었고, 덕만공주만이 아직 혼인하지 않았사옵니다. 덕만공주는 미색이 셋 중에 으뜸일 뿐만 아니라 몹시 총명한지라, 진평왕은 덕만공주를 가장 총애하여 덕만공주의 부군을 후계자로 지명할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우영은 가야 출신으로 예전에는 신라의 진평왕을 섬겼지만 당나라에 귀순한 자인데, 진평왕을 섬긴 관계로 신라의 내부 정세를 잘 알고 있었다.
   당태종은 덕만공주의 나이가 궁금하여 우영에게 물었다.
   "덕만공주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가?"
   "덕만공주는 임술년생으로 25살이옵니다."
    "헌데, 어찌 지금까지 혼인하지 않았단 말인가?"
    "소신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나 아마도 진평왕이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 하옵니다."
   당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덕만공주와 다른 공주들에 대해서 그대가 아는데로 말해보게."
   "본래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총애했사옵니다. 선화공주는 절세의 미녀로 소문나 백제의 왕자였던 무왕이 흠모하여 신라에 잠입한 후, 선화공주를 밤 몰래 만난다는 소문을 내었사온데, 진평왕은 소문만 믿고 선화공주를 절에 유폐시켰사옵니다. 무왕은 선화공주가 유폐된 절에 잠입하여 백제로 데려간 후에 정비로 삼아 지금의 백제의 왕후가 되었사옵니다."
   당태종은 무왕이 적국의 공주와 혼인했다는 말을 듣자 자신이 대신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수나라 양제의 공주 양비와 혼인했던 일이 기억났다.
   "무왕은 어찌 선화공주를 데려갈 수 있었는가? 신라는 적국의 왕자가 잠입하여 공주를 데려갈 정도로 허술한 나라인가?"
   "무왕의 본명은 서동이온데, 신라인으로 변장하여 어린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선화공주가 서동과 밤에 몰래 만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하옵니다. 소문을 사실로 믿은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절에 유폐시켰고, 서동은 유폐된 선화공주를 설득하여 백제로 데려갔다고 하옵니다."

당태종은 진평왕의 경솔한 처사에 혀를 찼다.
"어찌 자신의 딸을 믿지 않고 소문만 믿는단 말이냐? 진평왕도 참으로 딱하구나!"

 

 

 

Posted by labyrint


개구장이 소년의 첫사랑 5화


현주는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말한 후에 다시 부엌에 가서 음식을 준비했다.
희진이는 방금 전에 현주의 편지를 빼았아 읽었던 것이 미안했는지 부엌에 가서 현주를 거들었다.
현주의 나머지 친구들은 소파에 앉아 간식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현주는 음식이 모자랄 것 같아서 음식을 시키려고 친구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음식이 조금 모자랄 것 같은데, 먹고 싶은 것 없니?"

희진이는 미소를 지으며 현주에게 봉지 보따리 하나를 주면서 말했다.
"현주야, 우리가 조금 사왔어."
희진이가 준 봉지 보따리에는 떡볶이 떡가리와 라면이 가득했다.
"우리 라볶이 먹자. 이거면 우리 10명이 배터지게 먹고도 남을거야."
"라볶이? 그래도 되겠니?"
"라볶이가 어때서? 맛있쟎아."
희진이는 같이 온 친구들에게 물었다.
"너희들도 좋지?"
"당근 좋지. 라볶이 좋아."
옆에 있던 철수도 신이나서 말했습니다.
"와~ 나도 라볶이 먹고 싶어."

현주는 친구들이 라볶이를 먹고 싶다고 하자, 희진이와 함께 라볶이를 요리했다.
현주는 라볶이를 만들어 어머니께서 이미 요리해 놓으신 떡복이와 다른 음식들을 철수와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저녁식사를 하는 중 소연이가 현주에게 물었다.
"현주야, 그 짜식 어떻게 했어?"
그 짜식이란 현주를 안경잡이라고 놀린 철수를 말하는 것이다.
현주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구?"
"누구긴 누구야? 널 안경잡이라고 놀린 녀석이지."

철수는 소연이가 말하는 '녀석'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현주는 잠시 머뭇한 후에 말했다.
"화해했어. 그 애가...... 잘못했다고 사과해서......"
소연이는 '그 짜식'이 철수인지 모르고 철수에게 말했다.
"철수야, 앞으로 그 녀석이 또 현주 놀리면, 아주 박살을 내버려. 우리도 거들께."
현주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학교에서 싸우면 정학당하쟎아......"

소연이가 보니 현주와 철수 모두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 철수가 '그 짜식'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됐어. 그건 그만 얘기하자."


8시가 되자 현주의 친구들은 하나 둘씩 가기 시작해 9시가 되었을 때는 현주와 철수만 남았다.
철수도 시간이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 현주에게 말했다.

"현주야, 나, 이제 그만 가봐야 되겠어."
"어, 그래. 오늘 정말 즐거웠어."
"니 친구들이 와서 더 즐거웠던 것 같아."
"그건, 그런 거 같아. 하지만 친구들이 오지 않았어도 즐거웠을거야."
"맞아. 친구들이 없었으면 더 재미있게 보냈을 것 같아. 우리 둘이 오붓하게....."

현주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면서 철수에게 물었다.
"오늘 한 말 진심이었지?"
철수는 현주의 친구들과 신나게 떠드는 바람에 오늘 현주와 사귀기로 한 날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뻔 했다.
"당연히 진심이지. 앞으로 날 지켜봐줘."
"좋아. 지켜볼께..."
"근데... 니 생일이 우리 만난 기념일이 되었네."
"뭐, 어때... 같이 하면 되지."
"오히려 잘 된거 같아. 앞으로 우리 기념일을 잊어버릴 일이 없으니까..."

현주는 철수가 현주의 생일과 기념일이 같아서 잊어버릴 일이 없다는 말에 토자리듯이 말했다.
"뭐? 그럼, 내 생일이 아니면 기념일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거야?"
"아니... 그런게 아니라... 아무튼... 잊어버릴 일은 없쟎아... 헤헤..."
"철수야, 기념일은 1년에 한번만 오는게 아니야... 100일... 200일... 100일 단위로 오는 거란 말이야."
철수는 기념일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지만, 현주가 실망할까봐 아는 척하면서 말했다.
"아, 나도 알아. 그냥 해본 소리야. 아무튼 절대 널 실망시키지 않을께."

현주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혼자 생각했다.
'그래, 철수야... 나... 실망시키면 안되...'
현주는 철수를 환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Posted by labyrint


 개구장이 소년의 첫사랑 4화




이때 '딩동딩동'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닐텐데... 잠깐만 기다려..."
현주의 어머니는 현주가 철수와 재미있게 놀 수 있게 자리를 비워준 것이고, 아버지는 8시에나 들어오시기 때문에 현주는 누가 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주가 현관문 구멍으로 보니 초등학교 친구들이 8명이나 몰려왔다.

현주는 당황하는 표정으로 철수에게 말했다.
"초등학교 친구들이네... 어쩌지?"
"어째긴 어째? 같이 놀면 되지? 먹을 것도 많은데..."
"다 여자애들이야."
"뭐, 어때? 난 상관없는데..."

현주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폰으로 물었다.
"누구세요?"
"현주야, 우리왔어. 오늘 너 생일 맞지?"

현주는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현주의 친구들은 거실에 있는 철수를 보자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 현주야, 너 남자친구니?"
"어, 그래..."
"어쩐지 생일인데도 연락이 없어서... 많이 서운했는데... 흥... 좋은 소식을 숨기고 있었구나."
"사귄지 얼마 안되..."

현주의 친구들은 각자 가져온 생일선물을 현주에게 준 후에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얘들아, 정말 고마워..."
"고맙긴... 근데, 우리... 니가 초대하지 않아서 쪼끔 섭섭했었는데... 와서 보니까... 이해해... 호호..."
"우린 니가 새 친구들 만나서 우릴 헌신짝처럼 버린 줄 알았다... 호호..."

사실 현주도 초등학교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었지만, 초대할 수 있는 남자가 철수뿐이라서 어색할까봐 친구들을 초대하지 않았는데, 친구들이 제 발로 걸어와 주자 반갑기는 했다.

현주는 철수와 자신의 초등학교 친구들을 서로 소개시켜 주었다.
"얘들아, 얘는 철수고... 철수야... 이 쪽부터 차례로... 희진이, 영희, 혜숙이, 순정이, 경희, 연선이, 미연이, 소연이..."

철수는 현주의 친구들에게 먼저 인사했다.
"반갑다. 나, 철수야."
"현주한테 잘해줘. 아니면... 알지? 호호..."

현주는 친구들의 말에 같이 웃으면서 말했다.
"얘들아, 겁주지마..."
"너, 벌써부터 남친편들기야? 어머... 사귄지 얼마 되었다구... 호호..."

현주는 친구들이 배가 고플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말했다.
"너희들, 기다려. 내가 음식을 가져올께."

현주는 친구들에게 말은 했지만, 철수만 초대해서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케익하고 과자하고... 떡복이하고... 이것저것 먹다보면... 허기는 면하겠지...'

이때 희진이가 말했다.
"현주야, 음식은 나중에 하고... 먼저 생일선물 뜯어보기 하자..."

현주도 친구들이 가져온 생일선물이 궁금하여 하던 일을 멈추고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희진이는 재빨리 철수가 가져온 선물의 포장을 뜯었다.

현주는 철수의 카드와 선물의 포장을 살짝 뜯은 후에 다시 봉해놓아서 친구들은 철수의 선물이 가장 궁금하였던 것이다.
현주는 철수의 고백이 담긴 카드를 뺀 후에 친구들에게 철수에게 받은 선물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철수의 선물은 이미 희진이의 손에 있었다.

현주는 희진이에게 외쳤다.
"잠깐!"
하지만 희진이는 이미 포장을 뜯어 철수의 카드를 펼치고 있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현주야.
너의 14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희진이는 철수가 현주에게 준 카드를 큰 소리로 읽었다.
현주는 희진이의 손에 있는 카드를 빼았으려고 했지만, 희진이는 소파에 올라가 계속 읽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지 모르지만, 내 성의니까 부담없이 받아줘."
현주는 큰 소리로 희진이에게 외쳤다.
"이리줘."
현주의 외침에도 희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드를 계속 읽었다.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을거야. 너를 사랑하는 철수가..."

카드를 다 읽은 희진이는 그제서야 현주에게 카드를 돌려주었다.
카드를 돌려받은 현주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희진이는 웃으면서 현주에게 말했다.

"우리끼리 무슨 비밀이 있다고 그래? 나도 남자친구한테 카드 받으면, 보여주면 되쟎아. 호호..."
"어디 두고 보자."

현주는 희진이에게 '어디 두고 보자.'고 말했지만, 미소를 지으면서 친구들의 선물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책, 화장품, 루즈, 귀걸이 등 다양한 선물이었다.

현주의 친구들은 모두 정성이 가득해 보이는 선물을 준비했다.
현주는 친구들의 선물에 따뜻한 정을 느꼈다.
"고마워, 모두들......"

Posted by labyrint


현주는 철수가 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자 궁금해져 철수의 집에 전화했다.
철수의 형인 민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철수있어요?"
"없는데, 누구야?"
"현주라고 하는데요. 철수 어디 갔어요?"

민수는 아침에 철수가 누구 생일에 간다는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나서 말했다.
"나도 모르겠는데, 내가 듣기론 누구 생일에 간다고......"
"아, 제 생일일거예요. 제가 초대했거든요."
"근데, 아직 안갔니? 뭐, 곧 도착하겠지."
"네, 잘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현주는 철수가 선물을 사러갔을 거라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선물 안사와도 되는데...... 근데, 뭘 준비했을까?'
현주의 어머니는 오기로 한 현주의 친구가 오지 않자 궁금해서 현주에게 물었다.
"친구는 언제 온데?"
"선물 사러 갔나봐요. 오겠지요."

현주의 어머니는 현주가 생일에 한명만 초대했다는 말에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친하지 않아도 초대할 수도 있고, 초등학교 때 친구들도 있을텐데 한명만 초대하는 것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얘들이 사귀나?'

6시 30분이 되서야 초인종이 울렸다.
현주는 초인종 소리를 듣자 철수가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현관으로 달려갔다.
"누구세요?"
"나...... 철수야."

현주가 문을 열어주니 철수는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뛰어왔니? 어서 들어와."

철수는 현주에게 선물을 건내주었다.
"생일 축하해. 선물이야."
"고마워. 이런거 안 가져와도 되는데......"

현주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선물을 받자 너무 기분이 좋았다.
"이거 지금 뜯어봐도 되?"
"니건데, 뭐, 니 마음이지......"
현주가 포장을 뜯어보니 향수였다.
현주는 선물 안에 있는 카드를 보자 카드를 뜯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현주야.
너의 14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선물이 마음에 들지 모르지만, 내 성의니까 부담없이 받아줘.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을거야.
너를 사랑하는 철수가.'

현주는 철수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와줘서 정말 고마워."
"초대해줘서 고마워."

현주의 어머니는 준비를 다 한 후에 현주에게 말했다.
"현주야, 엄마는 볼 일이 있으니까 잘 찾아서 먹고 놀아라."
현주의 어머니는 둘이서 재미있게 놀도록 친구집에 가는 것이었다.
철수는 현주와 단 둘이 있자 묘한 기분이 들면서 가슴이 뛰었다.
현주가 철수에게 말했다.
"뭐 먹을래?" 아이스크림, 떡복기, 제리, 사탕, 과자, 케이크...... 뭐든 말해봐."
"아이스크림 먹자."

현주는 철수가 헐떡거리는 모습이 생각나서 말했다.
"쥬스 마실래?"
"좋아."
현주의 어머니는 현주에게 아이스크림은 식후에 먹으라고 말했기 때문에 현주는 쥬스를 꺼내 철수에게 따라 주었다.

철수는 뛰어 오느라고 미쳐 현주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못 봤는데, 현주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철수는 헐레벌떡 뛰어왔기 때문에 현주의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뛰고 있었지만, 현주의 예쁜 원피스를 보자 가슴이 더 빠르게 뛰게 되었다.

철수는 현주가 따라준 쥬스를 마시려고 쥬스컵을 들었는데,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현주는 철수의 손이 떨리는 것이 보이자 웃으면서 말했다.
"많이 뛰었니?"
철수의 손이 떨리는 것은 뛰어서가 아니라 예쁜 원피스를 입은 현주의 모습에 가슴이 뛰어 떠리는 것이었다. 철수는 자신의 마음이 들킨 것 같아 쑥스러워 머리를 긁적였다.
"어, 내가 좀 많이 뛰었어."

"이제 뭘 먹을까?"
"아무거나..."
현주는 제리와 과자를 가져왔다.
철수는 현주가 주는 과자를 손으로 집어 먹었다.
현주는 갑자기 고개를 붉히면서 철수에게 물었다.
"철수야, 카드...... 진심이야?"

철수는 현주와 친하게 지낸지 얼마되지 않아 현주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려면 더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현주가 카드의 고백이 진심이냐고 묻자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진심이야. 너는 나의 천사야."
"천사? 나, 사실은 성질이 좀 있는데......"
"그래도 난, 니가 좋아."
"정말?"
"정말이고 말고...... 남아일언은 중천금이잖아."
현주는 철수의 재치있는 말에 '호호'하며 웃었다.

"호호호...... 중천금인지, 일만금인지, 지켜볼께."
"지켜봐줘."
현주는 지켜봐 달라는 철수의 말에 환하게 미소지었다.

Posted by labyrint


다음 날이 되자 소년은 소녀와 함께 학교에 가기 위해서 소녀의 집근처에서 기다렸다.

소녀는 소년을 보자 반갑게 외쳤다.

"철수야!"
"현주야, 안녕."

소년의 이름은 철수였고, 소녀의 이름은 현주였다.
현주는 철수에게 물었다.
"근데, 여기서 뭐해? 날 기다렸니?"
철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가다가...... 혹시나 해서......"
현주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같이 가자."

철수와 현주가 나란히 학교에 등교하자, 친구들이 물었다.
"니들 사귀니? 너무 사이좋은데......"
"아니, 우리 안사귀는데."
현주의 친구들은 철수와 현주가 친해보이자 현주에게 둘이 사귀냐고 물었지만, 현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우리 안사겨."

수업이 끝나자 현주와 철수는 집에 함께 갔다.
이 날부터 철수와 현주는 단짝처럼 등하교를 함께 했다.

하루는 현주가 철수에게 말했다.
"너, 내일 시간있어?"
"있는데, 왜?"
"내일...... 내 생일이야. 꼭 와야되."
철수는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꼭 갈께......"

철수는 현주의 생일이 언제인지 몰랐다.
철수가 현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예쁘다는 것과 집주소, 나이, 현주가 외동딸이라는 것 정도였다. 현주의 입으로 생일을 가르쳐 주고, 생일을 초대받고 나니 연인 사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철수는 그동안 돼지저금통에 모아두었던 돈을 현주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쓰기 돼지저금통을 깨버렸다.
철수의 어머니는 애가 뭐 그리 큰 돈이 필요한지 궁금하여 물었다.

"철수야, 너, 여자친구라도 생겼니? 갑자기 돼지저금통을 깨다니......"
철수는 어머니께서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이 말씀하시자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여자친구는 아닌데요...... 생일에 초대받아서요."
"이 엄마한테 말하지. 특별히 돈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잖아."
"아니예요. 됐어요. 그렇지 않아도 돼지저금통에 얼마가 있는지 궁금해서 깨려고 했어요."
어머니는 아들이 어른스러워진 느낌이 들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네 마음대로 하렴......"

철수는 동전을 은행에서 지폐로 바꾼 후에 백화점에 갔다.
철수는 백화점에서 이것저것을 둘러보았지만, 무엇을 사야될지 생각할 수 없어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주가 좋아하는 것이 뭘까?'

이것저것 살펴보았지만, 무엇을 사는 것이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물어 볼 걸 그랬나? 아니야, 놀라게 해주려면...'

백화점의 세일즈걸은 어린 소년이 아까전부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도 아무 것도 사지 않자 웃으면서 물었다.
"뭐 필요하신거라도 있으세요?"
"친구 생일 선물 하려구요."

세일즈걸은 소년이 소녀에게 선물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여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여자친구요?"
"아니요, 여자친구는 아니예요."
"아무튼 여자인 것은 맞지요?"
"네......"
"예산은 얼마로 잡으셨어요?"
"3만원이요."

세일즈걸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3만원이요?"
"네, 이 정도로는 좋은 선물을 살 수 없나요?"
"아니예요. 충분해요. 액수가 생각보다 쎄서요. 많이 좋아하시나봐요. 비싸다고 좋은 건 아닌데...... 카드는 있어요?"
"아니요? 그냥 공책에 있는 종이 하나 쓰려구요..."

세일즈걸은 웃으면서 말했다.
"3만원짜리 선물에 공책 찢어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1000원짜리 카드도 예쁜게 많으니 카드 하나 사세요."
"여기서 파나요?"
"백화점에서는 안 팔구요. 문방구에서 하나 사세요."
"아, 그래야 되겠네요."

철수는 세일즈걸에게 물었다.
"누나, 누나라면 무엇을 받고 싶어요?"
세일즈걸은 어린 소년이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자 기분이 좋아 웃으면서 말했다.
"뭐든 좋지요. 친구가 주는 선물인데......"
"특별히 받고 싶은 거 없으세요?"

세일즈걸은 웃으면서 말했다.
"글쎄요. 저는 향수가 받고 싶어요."
"저도 그걸 사야되겠어요."
"그러시겠어요?"
"네......"

세일즈걸은 화장품 가게의 판매원이었다.
"영수증을 드릴께요.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환불 받으실 수 있어요."
철수는 향수를 사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자신이 선물한 향수를 사용하는 것은 생각만해도 기분이 좋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철수는 현주를 기다렸지만, 현주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현주는 생일 준비를 이것저것 하느라 저녁 늦게 자서 아침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아침에 철수와 같이 학교에 가지 못한 것이다.
학교수업이 끝나자 현주는 철수에게 '나 어디 들렸다 가야하니, 오늘은 너 먼저 가.' 라고 말한 후에 혼자 가버렸다.
철수는 현주가 혼자서 집에 가져 학교 근처에 있는 문방구에 가서 예쁜 카드 하나를 샀다.

집으로 온 철수는 카드에 쓸 내용을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철수는 갑자기 고등학교 다니는 형이 생각났지만, 형은 언제 올지 몰랐다.

철수는 갑자기 백화점 세일즈걸이 생각났다.
'누나... 그 누나한테 물어보면 되겠다.'
철수는 혹시 세일즈걸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까봐 향수를 들고 화자품 가게에 가서 세일즈걸을 찾았다.
"누나, 저 기억하시지요?"
"당연하지요."
"저기요. 하나 물어봐도 되요?"

"뭐든요."
"카드에 뭐라고 써야 되요?"

세일즈걸은 소년의 질문에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사람 마음이지요. 뭐든 하고 싶은 말을 쓰세요."
"저기요... 좀 가르쳐 주세요. 무슨 말을 써야 될지 모르겠어요."
"글쎄요... 제가 시범적으로 써줄께요. 여기에다 손님이 더 추가해 쓰세요. 친구 이름이 뭐예요?"
"현주요."
"나이는?"
"14살이요."
"현주...... '천사처럼 아름다운 현주야. 너의 14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선물이 마음에 들지 모르지만, 내 성의니까 부담없이 받아줘.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을거야. 너를 사랑하는... 이름이?"
"철수요."
"이 정도로 쓰면 될거예요."
"감사합니다."
"뭘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세일즈걸은 카드에 쓸 글을 적은 메모지를 철수에게 주었다.
철수는 아가씨가 카드에 쓸 글을 써준 메모지를 가지고 쏜살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선물이 없었다.
'아차, 선물을 백화점에 두고 왔구나.'

철수는 다시 백화점으로 뛰어갔다.
백화점은 걸어서 30분 거리였는데, 버스가 자주 오지 않아서 뛰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철수가 화장품 가게로 가자 세일즈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선물을 놓고 가셨어요. 여기요."
"정말 감사해요."

철수는 아가씨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말할 시간도 없어 선물을 돌려 받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철수는 그동안 많이 뛰어 다리가 아팠지만, 모든 힘을 다해 뛰었다.
시계를 보니 철수가 현주에게 약속한 시간인 6시가 넘었다.


Posted by labyrint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