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 조정우 시대소설 미리보기 



장옥정

저자
조정우 지음
출판사
청어 | 2013-04-0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어 너와 영원히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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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광리, 방이 아흔아홉 칸이나 되는 대궐 같은 저택의 정원에 오색 비단옷을 곱게 차려 입은 젊은 낭자가 화사하게 핀 정원의 꽃들을 감상하며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백옥처럼 하얀 얼굴에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채 사뿐사뿐 걸어가는 낭자의 자태는 월궁 선녀가 하강한 듯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활짝 핀 모란을 바라보는 낭자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꽃들이 만개한 봄이 왔건만 어쩐지 내 마음은 한겨울과도 같구나! 여태 이 나이가 되도록 배필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올해로 스물두 살인 낭자의 이름은 장옥정이었다. 열둘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종백부 장현의 슬하에서 열 번째 봄을 맞는 옥정은 여태껏 배필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휩싸여 있었다.

   '언제쯤 내 배필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 아버님의 반만 되는 사내만 되어도 내 마다하지 아니하련만......'

   옥정의 아버지 장경은 학문과 재능을 겸비한 조선 제일의 역관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옥정이 겨우 열두 살 때, 역시 역관으로 조선 최고의 거부가 된 사촌형 장현에게 처자식을 부탁하는 유지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옥정이 혼기가 되자, 장현은 양반 가문 중에서 여러 혼처를 알아보았건만, 옥정은 항상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첩실은 싫사옵니다. 중인의 가문이라도 정실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기실 마음이 갔던 혼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양반의 위세를 내세워 옥정을 첩실로 들일 생각이었기에 혼사를 거절했던 것이었다. 정실이 아니면 시집가지 않겠다는 옥정의 고집에 장현은 어쩔 수 없이 중인의 가문에서 혼처를 구해봤지만, 옥정의 마음이 가는 혼처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조선팔도 강산에 어찌 이다지도 사람이 없단 말인가!'

   옥정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상념에 잠겨있을 때, 시녀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씨, 주인 어르신께서 아씨를 찾으시옵니다."

   옥정은 곧장 장현의 처소로 발걸음을 하였다.

   "소녀를 찾으셨나이까?"

   장현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운을 뗐다.

   "내, 방금 동평군을 뵙고 왔느니라."

   인조의 서자 숭선군의 장자인 동평군은 예전부터 장현이 마음에 둔 혼처였지만, 옥정이 거절한 바 있었다. 약관의 나이인 동평군은 학식이 있고 외모도 준수하여 옥정이 바라는 수준의 혼처였지만, 이미 정실이 있는 동평군의 첩실이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옥정은 고개를 숙인 채 장현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동평군께서는 임금의 승하 시, 왕위를 계승하실 분이시다. 동평군께서 너를 어여삐 여기고 계시던데, 정녕 마음을 돌릴 수 없겠느냐?"

   옥정은 말이 없었다. 싫다는 표정이었다. 장현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영의정 허적의 아들 허견이 일으킨 역모에 숙종의 근친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삼형제가 연루되어 귀양간 터라, 왕자가 없는 숙종이 승하한다면, 동평군이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다. 장현은 이처럼 위풍당당한 왕족 동평군에게 옥정을 맺어주고자 했지만, 옥정은 확고부동해 보였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장현이 입을 열었다.

   "마음에 둔 혼처라도 있느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첩실로 가기가 싫은 것 뿐이옵니다...... 소녀, 역관의 처가  될지언정, 그 누구의 첩실도 되고 싶지 아니하나이다."

   "그게 정녕 너의 뜻이라면...... 어찌할 수가 없구나."

   "송구하기 짝이 없나이다."

   "괜찮다. 이 백부는 너의 행복을 바랄 뿐이니라. 다른 혼처를 구해보마."

   "소녀, 백부님의 크신 사랑에 감읍할 따름이나이다."

   옥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현이 말했다.

   "내 시급히 처리할 일이 있으니, 그만 나가보거라."

   이때 장현은 자신이 자금을 대준 복선군 삼형제가 역모에 연루되어 그 화가 자신에게까지 미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현의 처소를 나오는 옥정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백부님께서 나를 친딸처럼 총애하시거늘, 난 백부님을 실망시키기만 하는구나. 허나, 어머님의 뜻도 나와 같으니 어찌 이것이 나의 잘못이겠는가!'

   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본시 역관 윤성립의 딸로 어릴 적엔 부족함 없이 살았으나, 억울하게 누명을 쓴 소현세자비 강빈의 역모에 연루되어 온 가족이 노비의 신분으로 몰락한 비운의 과거를 지닌 여인이었다. 미색이 빼어났던 윤씨는 대왕대비 조씨의 사촌동생 조사석 처의 여종으로 있던 중 우여곡절 끝에 장경의 첩실로 들어갔다가 정실이 되었다. 첩실의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윤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옥정을 정실로 시집보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장현도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옥정을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옥정은 마음을 다스리고자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이내 애절하면서도 구슬픈 거문고 가락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아버님께서 너무 일찍 이승을 떠나셨사옵니다. 소녀, 아버님께 거문고타는 법은 배웠으나, 혼인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배워야 하나이까?'

   거문고의 명인인 장경에게 배운 옥정 역시 거문고에 대단히 뛰어났다. 봄바람을 타고 마당으로 울려 퍼지는 옥정의 거문고 소리는 사람의 혼을 사로잡을 정도였다. 옥정이 세상의 고민을 머리에서 지운 채 한창 거문고 연주에 몰입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마당에서 온 집안이 떠나갈 듯이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장현과 장현의 일가를 추포하라는 전하의 명이시다! 장현의 일가 사람들은 식솔 식객 하인 가릴 것 없이 모두 오라를 받으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옥정이 깜짝 놀라 급히 거문고를 밀어 놓고 일어나는 순간, 옥정의 시종 철영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포도청의 포졸들이 들이닥쳤나이다. 속히 따라오소서!"

   "대체 무슨 일이냐?"

   "큰 사단이 난 듯하니, 일단 피하소서."

   철영이 옥정의 손목을 나꿔채 방을 나서자, 옥정이 외쳤다.

   "신을 다오!"

   철영은 다급히 분홍꽃신 한 켤레를 집어든 후 옥정의 손목을 다시 잡아 뒷문으로 끌어갔다. 옥정은 버선만 신은 채 끌려가던 중 어머니 윤씨와 오라비 장희재가 떠올라 멈추어 섰다.

   "어머님과 오라버니는 어디계시느냐?"

   "일각이라도 지체하단 모두 잡힐 것이옵니다. 아씨라도 피하셔야 하옵니다."

   철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철영이 옥정의 손목을 잡아 끌고 가자, 포졸 하나가 호통쳤다.

   "멈추어라! 도망치면 죄가 커지니, 순순히 오라를 받거라!"

   도망칠 새도 없이 포졸들이 사방에서 포위하며 달려왔다. 옥정은 도망쳐도 잡힐 것 같아 철영의 손에 몇 걸음 끌려가다가 멈추어 섰다.

   "너나 도망치거라. 나는 발이 느려 아니되겠다."

   옥정이 멈추자, 철영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철영이 애타게 탄성을 질렀다.

   "아씨!"

   그새 수십명의 포졸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서 순순히 오라를 받지 못할까!"

  포졸들이 오라를 들고 옥정과 철영에게 다가오는 순간, 누군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옥정의 손을 낚아챘다.

   "오라버니!"

  옥정의 오라비 장희재였다. 장희재는 옥정과 철영을 향해 다가가던 포졸들을 발로 차 넘어뜨린 후 옥정의 손을 잡고 달려가며 철영에게 외쳤다.

  "우릴 엄호해다오!"

  주인의 명에 철영은 재빨리 넘어진 두 포졸의 허리춤에 있는 몽둥이 두개를 빼내어 양손에 쥐고 미친 듯이 휘둘렀다. 워낙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포졸들이 주춤하는 틈에 옥정과 희재는 무사히 뒷문까지 달아날 수 있었다. 장희재가 뒷문의 빗장을 풀고 대문을 열어 젖히자, 옥정이 도망쳐 나온 곳을 바라보며 외쳤다.

   "철영은 어찌 하오리까? 어머님은요?"

   "일단 나가자! 우리가 살아야 어머님도 구할 수 있을 터."

   손목을 잡혀 어쩔 수 없이 희재를 따라나선 옥정은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뒷문에서 이어진 산길을 달려 장현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숲에 이르자 옥정이 숨을 헐떡이며 멈추어 섰다.

   "더는 못 가겠사옵니다."

   "그래, 잠시만 쉬도록 하자. 하지만 서둘러 멀리 도망쳐야 안심할 수 있다."

   옥정은 심호흡을 가다듬은 후 근심어린 얼굴로 말했다.

   "도망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질 않사옵니까? 어머님과 백부님을 구해야 하옵니다. 철영도요. 소녀, 조대감께 도움을 청할까 하옵니다."

    대왕대비 조씨의 사촌동생인 조사석은 옥정의 어머니 윤씨가 시집오기 전에 모시던 주인이자 정인으로 그 당시, 윤씨를 몹시 사랑했던 조사석은 옥정과 희재에게 한결같은 정을 베풀어왔다. 옥정의 말에 희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서석 대감께 가자꾸나."

   옥정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되옵니다. 오라버니께서는 장안을 떠나셔야 하옵니다. 저로 인하여 오라버니께서 포도청의 포졸들을 때려 눕히셨으니, 그 죄를 어찌 감당할지 모르겠사옵니다."

   옥정을 구하기 위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지른 일이었다. 옥정의 말을 듣고 보니, 희재는 걱정이 되었지만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너무 심려치 말거라. 조대감께서 계시지 않느냐?"

   "나라의 법을 어기면, 영의정의 자식이라도 죄를 면하기 힘든 일이옵니다. 아무래도 오라버니께서는 일이 수습이 될 때까지 일단 장안을 떠나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조대감께는 소녀가 저희 일가의 억울한 사정을 아뢰어 도움을 청하겠사옵니다."


   희재와 작별하고 조사석 집으로 향하는 옥정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다시는 조대감의 집에 가지 아니하려 하였건만, 이젠 피할 수가 없구나!'

   옥정은 자신을 항상 못마땅한 눈초리로 흘겨보던 조사석의 부인 권씨를 다시 대할 생각을 하니, 십 리도 안되는 길이 천 리 길이라도 되는 듯 걸어가는 길이 고단했다.

   30여 년 전, 역모의 누명을 쓴 부모님을 여의고, 갈 곳 없는 옥정의 어머니 윤씨를 하녀로 들인 권씨의 어머니 박씨는 윤씨를 가엾게 여겨 친딸처럼 보살펴주었다. 권씨 또한 윤씨를 가엾게 여겨 친자매처럼 대해주었는데, 조사석에게 시집간 권씨를 따라간 윤씨가 조사석과 밀회를 나누고 말았다. 그래서 권씨는 지금까지도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7년 전, 비단옷을 입고 어머니 윤씨와 함께 조사석 부부에게 신년인사 차 찾아온 열다섯 살의 옥정에게 권씨는 평생 잊지 못할 모욕을 주었다.

   "천한 종년의 딸이 비단옷을 입은 꼬락서니가 참으로 가관이구나!"

   조사석이 손님을 맞으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권씨는 그동안 쌓인 앙금을 옥정에게  풀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윤씨는 모욕감에 치를 떠는 옥정의 손을 꼭 쥔 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집으로 돌아온 후 윤씨는 이를 갈며 분해하는 옥정에게 눈물을 흘리며 타일렀다.

   "모든 것이 이 어미의 죄로 인한 것이다. 내가 마님께 큰 죄를 지었음에도 마님께서는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나를 네 아비와 맺어주셨다. 하여 네 오라비와 네가 태어난 것이니, 결코 마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옥정이 옛일을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을 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옥정아!"

   고개를 돌려보니 조사석의 아들 조태구가 하인 두어 명 함께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련님!"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누이처럼 다정하게 대해왔던 조태구를 보자, 영문도 모른 채 포졸들에게 쫓기고 있던 옥정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뻤다.

   "안색이 창백하구나! 몸은 괜찮은 것이냐? 네 어미와 오라비는 어디있느냐?"

   조태구는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옥정의 얼굴을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소녀와 오라버니는 도망쳐나왔으나, 어머님께서 포졸들에게 잡힌 듯하여 참으로 걱정이옵니다."

   "아버님께서 너희 가문에 생긴 일을 들으시고 곧장 포도청으로 가셨으니, 심려치 말거라."

   옥정은 탄성을 내뱉으며 물었다.

   "포도청의 포졸들이 들이닥쳐 주상의 명이라며 온 일가 사람을 추포하였사온데,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아시는 바가 있으시옵니까?"

   조태구는 분한 듯이 주먹을 불끈쥐었다.

   "서인들이 변란을 일으킨 모양이다. 수십의 남인 가문이, 너희 일가처럼 포도청의 몽둥이에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났다. 지독한 놈들......"

   순간 여기저기 찢어진데다 군데군데 흙이 묻은 옥정의 비단치마가 조태구의 시야에 들어왔다. 옥정은 워낙에 경황이 없던 터라 옷이 엉망이 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조태구의 시선에 그제야 얼굴이 붉어졌다.

   "속히 가마를 대령하라!"

   난데없는 주인 도령의 명에 하인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길 한복판에서 어찌 가마를 구해 대령하오리까?"

   "어허, 곤장을 맞고 싶지 않으면 속히 대령하거라."

   주인 도령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사방으로 흩어졌다. 옥정은 조태구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소녀는 괜찮사오니, 명을 거두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내가 알아서 하마."

   잠시 후 하인들이 제법 기품있는 가마를 들고 나타났다. 때마침 지나가던 양반댁 규수의 가마를 대왕대비의 친인척이라는 위세를 내세워 빼앗아온 것이었다.

   "가마를 대령하였나이다."

   "타거라. 우리 집으로 가서 아버님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상의해보자꾸나."

   "도련님의 크신 호의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옥정이 가마에 오르는 순간, 흙투성이에다 갈갈이 찢어진 버선발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를 본 조태구가 하인에게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꽃신 하나를 구해 오너라."

   가마에서 조태구에게 비단 꽃신 한 켤레를 건내받은 옥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게도 태구 도련님처럼 듬직한 오라비가 있으면 참으로 좋으련만......'

   옥정의 오라비 희재는 서른의 나이에도 장가들지 않고, 하는 일 없이 양반집 도령들과 어울려 기생집이나 찾아다니는 한량이었다. 희재가 비록 누이동생 옥정을 아끼는 마음이 각별하기는 해도 한량인 오라비를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느새 옥정을 태운 가마가 조사석의 집에 당도했다. 가마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십여명의 하인들이 몰려왔다.

   "아버님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셨느냐?"

   조태구의 물음에 하인 하나가 대답했다.

   "대감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셨나이다. 하온데, 도련님, 마님께서 부르시옵니다."

   조태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눈으로 옥정을 가리키며 하인들에게 명했다.

   "옥정 낭자를 객실로 인도하거라."

   하인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펴보며 주저했다. 옥정을 집안에 들인 것을 권씨가 알면 호된 꾸지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대감께서 아니 계시오니, 이만 떠날까 하옵니다."

   옥정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 하자, 조태구가 앞을 막아섰다.

   "아버님의 분부시니,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하오나......"

   "뭣들 하느냐! 어서 옥정 낭자를 객실로 인도하거라!"

   조태구의 다그침에 하인들이 재촉하자 옥정은 어쩔 수 없이 하인들을 따라 객실로 향했다.

   객실에 들어앉은 옥정은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권씨가 들이닥쳐 축객령을 내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읺아 권씨가 들어왔다. 아들을 친정에 심부름을 보내고 곧장 객실로 온 권씨는 싸늘한 눈초리로 옥정을 노려보며 호통쳤다.

   "천출의 여식이 어찌 감히 대감집 객실에 앉아있는 게냐? 당장 나가지 못할까?"

   권씨의 모욕적인 언사에 옥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참아야 한다. 어머님과 백부님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지 아니한가!'

   옥정은 분노를 억누르며 권씨에게 큰절을 올리고 객실을 나왔다. 그때 권씨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한 것이 예의는 아는구나!"

   옥정이 분노에 찬 발걸음으로 대문을 나서려 하자 하인들이 만류했다.

   "도령께서 낭자가 떠난 것을 아시면 우리가 무슨 면목으로 도령을 뵙겠소? 차라리 뒷마당 정자에서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소?"

   일가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이라 자존심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옥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하인들을 따라 뒷마당 정자로 갔다.

   정자에 앉아 몇 시진을 보낸 저녁 무렵, 조사석이 윤씨와 철영을 데리고 나타났다. 철영은 포졸들에게 흠씬 얻어맞아 얼굴 여기저기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윤씨가 눈물을 쏟으며 옥정을 와락 껴안았다.

   "옥정아,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소녀는 괜찮사옵니다."

   "몸이라도 성하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한숨을 돌린 윤씨는 아들 희재가 걱정되어 대뜸 물었다.

   "희재도 무사한 것이냐?"

   "잠시 장안을 떠나있다 돌아오기로 하였으니 심려치 마소서."

   옥정은 조사석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온통 만신창이가 되어 힘겹게 서있는 철영에게 다가갔다.

   "철영아, 네가 우리 때문에...... 몸은 괜찮은 것이냐?"

   옥정의 눈에 이슬같은 눈물이 맺혔다. 철영은 옥정이 자신을 염려하여 눈물을 보이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소인은 강골이라 끄떡없사옵니다. 심려하지 마옵소서."

   이때 조사석이 옥정에게 말했다.

   "내 너희 모녀에게 할 말이 있으니 따라오너라."

   옥정과 윤씨를 객실로 데려온 조사석은 천천히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포도청에 너희 가족이 우리 가문의 사람이라 일러두었으니, 이젠 근심하지 말거라." 

   윤씨는 조사석에게 큰절을 했다.

   "쇤네 가족을 구해주신 대감의 크신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그대가 장씨 일가의 안주인이 된지가 30여 년이 되었거늘 쇤네가 뭔가."

   윤씨는 문득 30여 년 전 조사석과 밀회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라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조사석도 그때의 생각이 떠올라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장현의 일은 내 손 밖의 일이라 내일 대왕대비마마께 아뢰어야 할 터인데......"

   역모에 연루된 장현을 구하는 것은 조사석의 손을 벗어난 일이었다. 대왕대비가 몸소 나선다 해도 장현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역적의 무리라는 오명을 쓴 장현을 구하지 못한다면, 옥정 역시 역적의 가문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조사석이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자, 윤씨가 푸념어린 어조로 말했다.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길 따름이옵니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평생을 정직하게 살아오신 우리 시아주버님을 버리지 않으리라 믿사옵니다."

   "마땅히 그리될 걸세."

   윤씨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았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조사석이 입을 열었다. 

   "의지할 곳은 있는가?"

   "소첩의 남동생이 이 근방에 있사오니, 잠시 의지할까 하옵니다."

   조사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롱에서 금덩이를 꺼내었다.

   "이걸 받게나."

   제법 큰 집을 사고도 남을 만한 값의 금덩이였다.

   "어찌......"

   "옥정을 시집보내려면 종잣돈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옥정을 위해서라도 받아 두게."

   "대감의 은혜에 감읍하기 그지없사오나 받을 수 없나이다."

   금덩이를 거절한 윤씨는 마음이 불편해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하오면 우리 모녀는 이만 떠날까 하옵니다."

   조사석은 담배대를 입에 문 채 한숨을 내쉬고는 그윽한 눈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윤씨를 바라보았다. 조사석은 자신이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윤씨의 눈물을 보자 가슴이 미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했다.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 도움을 청하게나."


   윤씨의 유일한 피붙이 남동생 윤정석은 윤씨가 장경의 첩실이 된 이래 30여 년 째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역모에 연루된 부모님을 여의고 윤씨와 함께 조사석 처가의 종이 되어 잡일만 하여 농사를 지을 줄도 모르고 천성도 게으른 탓이었다.

   이때 윤정석은 장현의 가문이 역모에 연루되어 포졸에게 추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조사석 집에 사람을 보내 윤씨의 소식을 알아보고 있던 차였다.

   '누님의 시댁이 풍비박산이 되었으니 이제 어찌 사나? 헌데 누님께서는 무사하실까?'

   윤정석이 소식을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윤씨가 옥정, 철영과 함께 당도했다.

   "누님,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은 윤씨는 서러움이 복받쳐 통곡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윤씨의 통곡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윤정석에게 옥정이 인사를 올린 후 말했다.

   "서인들의 모함으로 백부님께서 역모에 연루되어 백부님을 위시한 온 일가 사람들이 모두 포도청의 포졸들에게 추포되었고, 오직 우리 가족만 무사했을 뿐이옵니다."

   옥정 역시 서러움이 복받쳐 말끝을 흐리며 흐느꼈다.

   "우리 가족이라도 무사하였으니 천만다행이구나!"

   윤정석은 흐느끼며 우는 옥정의 어깨를 토닥여준 후 윤씨에게 말했다.

   "누님, 조대감께서 계시니 너무 심려치 마소."

   윤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눈물을 닦고 나서 집안을 둘러보니 곳간이 텅 빈 것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다.

   '내 동생이 사람은 좋으나 천하의 백수로 무능하기 짝이 없으니 이제 어찌 살까. 장씨 가문의 정실인 내가 예전처럼 남의 집 종노릇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윤씨의 눈길이 텅 빈 곳간에 머물자 윤정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매형께 곡식을 빌릴 참이었는데......"

   윤씨는 망연자실하여 탄식했다.

   "이 누이가 하나밖에 없는 내 아우의 곤궁함도 모르고 살았구나!"

   그제서야 텅 빈 곳간에 눈길이 멈춘 옥정은 윤정석이 자신의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음을 알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외삼촌께서 이리도 곤궁하게 사시다니! 한량인 오라버니를 의지할 수도 없는 일이니 이제 우리 모녀는 어찌 살까? 혼처나 제대로 구할 수 있을지......'

   이날따라 밤바람이 차가워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윤정석이 윤씨와 옥정 모녀에게 내어준 처소는 온돌방이었으나 장작이 없어 불을 지필 수 없었다. 옥정은 몸이 허약한 윤씨가 감기라도 들까 걱정되었다.

   '어머님이 걱정이구나! 따뜻한 이부자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따뜻했던 내 방이 그립구나! 백부님은 옥에서 잘 지내고 계실까? 오라버니께서는 어디서 밤을 보내고 있을까?'

   옥정은 걱정으로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제 온종일 식사도 하지 못하고 시달려 몹시 배가 고파진 옥정은 뒷산에 도토리라도 주울 생각으로 새벽부터 일어나 대문을 나섰다.

   "아씨!"

  철영이 절뚝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철영 역시 밤새 잠이 오지 않아 온통 멍든 몸을 뒤척이고 있던 중 문틈 사이로 옥정이 대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따라나선 것이었다.

   "여인이 혼자 새벽길을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쇤네도 따라가겠사옵니다. 어디를 가시려 하옵니까?"

   "곳간이 비어 도토리라도 주울까 한다. 몸도 성치 아니한데 괜찮겠느냐?"

   철영은 괜찮다는 듯이 두 팔을 번쩍 들어보였다.

   "쇤네 강골이라 끄덕없사옵니다."

   "허면 따라오너라."

   때마침 보릿고개인 3월이라 뒷산 어디에도 도토리를 찾을 수 없었다. 옥정은 다리에 맥이 풀렸다. 철영이 말했다.

    "도토리는 이미 사람들이 주워간 모양이니, 쇤네가 도끼를 가져와 장작이라도 해 가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순간 옥정은 어제 급히 도망쳐 나온 종백부 장현의 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문득 장현의 집에 남겨 둔 자신의 물건들이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이 어찌 되었는지 가봐야겠다." 

   옥정은 기대에 찬 발걸음으로 어제까지도 살았던 장현의 집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페허가 된 장현의 집은 쓸 만한 나무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마당과 정원에 심어져 있던 나무들은 밑둥만 남긴 채 베어 없었고, 문짝마저 모조리 뜯어가 버렸다. 옥정은 넋이 나간 얼굴로 폐허가 된 집을 두리번거렸다. 철영이 이를 갈며 한마디 내뱉었다.

    "지독한 놈들......"

    "입조심하거라."

   옥정과 철영이 인기척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조태구가 하인 몇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옥정이 고개를 숙여 조태구에게 인사를 했다.

   "도련님이 이곳에 어찌......"

   "궁금하여 와 봤느니라."

   옥정은 집안 곳곳을 둘러보며 탄식했다. 조태구가 연민의 눈으로 옥정을 보며 말했다.

   "실망이 크겠구나. 반드시 네 원수를 갚아주마. 네 백부를 모함한 자들을 발본색원하여 피눈물이 나게 만들겠다. 내 약속하마."

   "소녀, 다만 백부님을 구하고 어머님을 잘 봉양하고 싶을 따름이옵니다."

   옥정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포도청의 포졸들이 포도대장의 허락없이 조선 최고의 거부인 장현의 집안을 멋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옥정은 조심스럽게 조태구에게 말했다.

   "저들이 우리 가문의 집을 이처럼 쑥대밭으로 만든 것은, 아마도 포도대장의 지시가 있었던 것이 아닌지요."

   역적으로 몰린 장현의 가산을 적몰하라는 숙종의 명이 떨어져 있었다. 조사석이 윤씨를 구하러 포도청에 갔을 때 들은 사실로 조태구도 알고 있었지만 옥정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글쎄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조태구가 말끝을 흐리자, 옥정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 혹여 이번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면 말씀해 주소서."

   "이미 아버님께서 대왕대비마마께 네 가문의 무고함을 아뢰러 가셨으니, 심려치 말거라."

   이때 멀리서 날카로운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는 놈들이냐?"

   포도청의 포졸 몇이 몽둥이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뭐하는 놈들이기에 이른 시각에 역적의 집에 있는 게냐?"

   포졸의 호통이 끝나기도 전에 조태구의 하인 하나가 눈을 치켜뜨며 꾸짖었다.

    "무엄하다! 어찌 감히 이조판서 대감의 장자이신 도령께 이리도 무례한 게냐?"

   왕실 최고의 어른인 대왕대비는 자식이 없어 이조판서인 사촌동생 조사석의 아들 조태구를 친아들처럼 총애했다. 조태구의 신분을 알게 된 포졸들은 굽실거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지체 높은 도령을 몰라 뵌 소인들의 무례를 용서하소서."

    조태구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거든 썩 물러가거라."

    포졸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그중 한명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하온데 이 집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포도대장 나리의 명이 떨어졌사오니......"

    "알겠다. 이만 나가보마."

    옥정과 조태구가 일행과 함께 대문을 나섰다. 대문 바로 앞에는 비단으로 수놓은 수려한 가마가 놓여 있었다.

    "가마에 타거라. 내 너희 집에 볼 일이 있으니 함께 가자꾸나."

    조태구의 말에 옥정은 고개를 흔들었다.

    "미천한 소녀가 어찌 비단 가마에 탈 수 있겠나이까?"

    "타거라. 너는 중인의 가문이 아니냐? 중인은 비단 가마에 탈 수 있느니라."

    옥정은 단 한 번도 비단 가마에 탄 적이 없었다. 옥정의 종백부 장현이 검소한데다 양반이 아닌 중인 가문의 자식이 비단 가마를 타는 것은 풍속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옥정은 거듭되는 조태구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가마에 올랐다. 난생 처음 비단 가마를 탄 옥정의 가슴이 어쩐지 설래었다.

   '이 가마가 나를 신부로 데려가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옥정은 명망 있는 가문의 집에 정실로 시집가는 것이 꿈이었다. 양반이 아닌 중인이라도 아버지 장경처럼 인격과 학식이 뛰어난 사내라면 얼마든지 시집갈 용의가 있지만, 옥정이 기대했던 수준의 혼처는 여태껏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가마가 윤정석의 집에 당도했다. 비단 가마에서 나오는 옥정을 본 윤정석은어안이 벙벙하였으나 조태구를 보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도령께서 소인의 누추한 거처에 어인 일이시옵니까?"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 왔네." 

    윤씨 남매는 본래 중인의 가문이었으나 역관인 아버지 윤성립이 역모의 누명을 쓴 소현세자비 강빈을 옹호하다가 처형당하여 가산이 몰수되고 온 가족이 천인 신분이 되었다. 다행히도 윤씨의 자식 희재와 옥정은 숭록대부의 벼슬을 지낸 아버지 장경 덕분에 중인으로 태어났는데, 이 당시 벼슬아치에 한해 자식의 신분이 아버지를 따르는 종부법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정석의 처소로 들어간 조태구는 품속에서 금덩이를 꺼내었다. 

   "받아두게나. 아버님께서 자네의 누이를 생각해서 주시는 것일세."

   윤정석은 잠시 머뭇거리다 금덩이를 냉큼 받았다.

   "대감께서 누님께 큰 은혜를 배푸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여차하면 조사석에게 손을 벌릴 참이었는데, 조사석의 아들이 금덩이를 주니 체면을 살필 여지가 없었다. 다만 윤씨의 강직한 성격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다.

   "하온데 누님이 알고 야단을 치면 어찌 하오리까?"

   "아버님께서 자네에게 준 것으로 하면 어찌 하지 못할 걸세."

   윤정석은 그제야 안심되는 듯 함박 미소를 지었다.

   "옥정을 잘 부탁하네."

   조태구는 묘한 여운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경신년(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의 서자 허견이 숙종의 5촌 복선군을 왕위에 추대하려는 역적모의를 했다는 고발이 들어와 남인이 집권하고 있던 조정이 발칵 뒤집혀 서인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경신대출척이라는 이 환국으로, 영의정 허적, 좌의정 권대운, 우의정 민희 등 남인 출신의 조정 대신들이 대거 파직되고, 김수항, 김석주, 민정중을 비롯한 서인들이 조정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남인들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경신대출척이 일어났지만, 어떤 역적모의도 없었다. 허적의 서자 허견이 친분이 있는 복선군과 술을 마시다 취중에 말한 것이 화근이 되어 고변을 당한 것이었다.

   "주상께서 몸이 허약하시고 형제도 아들도 없으니, 만일 주상께서 승하하시면 대감께서 유력한 왕위 계승자가 될 터인데, 그때 서인들이 임성군을 왕위에 추대한다면, 이 몸이 병력을 움직여 대감을 왕위에 추대하겠소."

   임성군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의 차남으로 서인들이 숙종의 승하 시 임성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어 술김에 내뱉은 허견의 말이 숙종의 귀에까지 들려 효종 때부터 남인들의 돈줄 역할을 해왔던 장현까지 화가 미쳤던 것이다.

   이로 인해 허견은 능지처참당했고, 복선군은 물론 그의 형 복창군과 아우 복평군까지 역모에 연루되어 절도에 귀양 보내 위리안치(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가시로 울타리를 쳐 가두는 일) 중에 사형에 처해졌다. 뿐만 아니라 허견의 아버지 허적이 아들의 죄를 알고도 숨겼다는 죄목으로 해남에 귀양살이 중 사형을 당했고, 허견을 두둔했던 수십의 남인들도 사형을 당했다. 왕실과 조정에 이토록 처절한 피바람이 몰아친 것은 어영대장 김익훈을 비롯한 일부 서인들이 역적 소탕이라는 공을 세우기 위해 허견을 비롯한 남인들이 반정을 일으켜 숙종을 폐하고 복선군을 왕위에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했다고 모함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조선팔도에 큰 가뭄이 들어 기근으로 굶주린 양인들이 자신의 딸을 상공업 등으로 부를 축적한 천인의 집에 시집보내는 일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조정의 정권을 잡고 있는 서인의 영수 영의정 김수항은 숙종에게 종모법(자식의 신분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는 신분법)을 시행할 것을 주청 드렸다.

   "가뭄으로 곤궁해진 양인의 여식이 천인의 사내와 교혼하는 일이 허다한데, 일천즉천(부모 중에 하나만 천인이라도 자식이 천인이 되도록 정한 조선시대의 신분법)의 법으로 인하여 이들의 자식이 모두 천인의 신분이 되니, 이 나라의 군역과 조세를 맡은 양인의 수가 계속 줄어드는 실정이옵니다. 이 같은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서 선대왕 때 시행되었던 종모법을 다시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태종이 종부법(자식의 신분이 아버지를 따르도록 정한 신분법)을 시행한 이래 여태껏 왕족과 대신들의 자식에 한해 종부법이 시행되고 있어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인 숙종은 선뜻 결정할 수 없었다. 숙종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김수항에게 물었다.

   "천인의 여식을 첩으로 둔 대신들이 반발하지 않겠는가?"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에 한해서는 종부법을 계속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종친과 대신들에 한해서만 종부법을 시행한다면, 천인을 아내로 둔 양인들의 반발은 어찌 무마할 것인가?"

   예상치 못한 숙종의 물음에 김수항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백성들이 어찌 나라에서 시행하는 법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겠나이까?"

   "나라에서 시행하는 법이 불공평하다면 과연 백성들이 진심으로 승복하겠는가?"

   "종모법은 선대왕께서 만드신 법이온데 백성들이 어찌 불평할 수 있겠나이까? 바라건대, 종모법 시행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좀 더 숙고한 연후에 결정할 것이다. 이만 물러가거라."

   김수항이 대전을 떠나자, 숙종은 인경왕후의 처소로 발걸음을 하였다.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여식인 인경왕후는 열 살에 세자비로 간택되어 4년 후인 열네 살에 곤위(중전의 지위)에 올라 약관인 지금까지 국모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인경왕후는 자애로운 얼굴로 숙종을 맞았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어질고 현숙한 인경왕후는, 엄격한 어머니 대비 이외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는 숙종이 마음을 털어놓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숙종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영의정 김수항이 종모법 시행을 주청하였소. 그러면서도 종친과 대신들에 한해서는 종부법을 계속 시행하자 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려."

   "나라에서 종모법을 시행한다면 대신들 또한 종모법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나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으나, 천인의 여식을 첩으로 들인 대신들의 반발을 어찌 무마할지 그것이 걱정이오."

   인경왕후는 종숙부 김익훈이 얼마 전 천인의 여식을 첩으로 들인 사실이 떠오르자, 김익훈의 원망을 들을까봐 난처한 표정을 짓다 숙고 끝에 말했다.

   "이미 천인의 여식을 첩실로 맞아들인 대신들에 한해서만 그대로 종부법을 따르도록 예외를 두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구려."

   숙종이 교지를 써 종모법 시행령을 내리자, 이내 전국 방방곡곡에 종모법을 시행한다는 방이 나붙었다.


   옥정이 윤정석의 집에 정착한지도 어느새 한 달여, 윤씨와 옥정 모녀는 바느질과 길쌈질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윤정석이 그간 모아둔 재물이 넉넉하다며 호위호식하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백수인 윤정석의 집에서 무위도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윤씨와 함께 바느질을 하던 옥정은 이날따라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차 하는 순간 바늘이 옥정의 검지손가락을 찔러왔다. 옥정이 바느질을 멈추자 윤씨가 측은한 눈빛으로 옥정을 보며 말했다.

   "또 바늘에 찔린 것이냐?"

   "아니옵니다. 잠시 졸음이 와서......"

   태연한 척하는 옥정의 얼굴에 고통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바느질감을 방바닥에 내려놓은 윤씨는 한손에 바늘을 쥔 채 옥정의 손가락을 살폈다. 새파랗게 질린 옥정의 검지를 보자 윤씨는 가슴이 미어졌다.

   "내 조심하라 그리도 일렀거늘...... 오늘은 일감이 그리 많지 않으니, 너는 좀 쉬거라."

   이때 갑자기 대문이 덜컥 열리더니, 윤정석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어 들어왔다.

   "누님, 이거 큰일 났습니다. 포졸들이 방을 붙이며 공고하기를, 벼슬아치들에 한해 시행된 종부법이 폐지되고, 양반, 중인 가릴 것 없이 모두 종모법이 적용된다 하더이다. 이제 우리 희재와 옥정도 종모법이 적용될 터인데, 어찌 하오리까?"

   "그게 참말이냐?"

   "관청 나리께 확인한 사실이옵니다."

   옥정은 대체 종모법이 무엇이길래 외삼촌이 이리도 야단법석을 떠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갑자기 윤씨가 통곡했다.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이냐!"

   옥정의 아버지 장경은 역관으로 종1품 숭록대부의 벼슬에 올라 윤씨가 천인임에도 희재와 옥정이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중인이 된 것인데, 달포 전 장현이 역모에 연루돼  장씨 일가에 하사된 벼슬이 모두 삭탈된 데 이어 종모법이 시행되는 바람에 이 같은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옥정이 의아하여 물었다.

   "종모법이 대체 무엇이옵니까?"

   통곡하던 윤씨는 옥정을 껴안으며 절규했다.

   "옥정아, 그러게 진작 시집갈 것이지......"

   옥정은 이제야 종모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오면, 소녀와 오라버니 모두 어머님의 신분을 따르게 되는 것이옵니까?"

   "그렇단다. 창졸간에 너와 네 오라비가 천출이 되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이냐?"

   옥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지만 마음을 진정시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백부님께서 역적으로 몰리셨을 때,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옵니다. 어차피 우리 가문은 역적으로 몰려 천출과 별반 차이가 없지 않사옵니까?"

   "모르는 소리 말거라. 네가 무얼 안다고......"

   "어머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였으니,너무 낙담하지마세요. 조대감께서 우리 모녀를 버리지 아니할 터인즉, 무슨 좋은 수가 생기지 않겠사옵니까?"

   옥정이 윤씨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어머님, 소녀에겐 어머님이 가장 소중하옵니다. 부디 마음을 편히 하소서. 소녀 반드시 좋은 혼처를 구해 어머님께 효도하겠사옵니다."

   윤씨는 옥정을 대견한 듯 바라보다 껴안았다.

   "그래, 네가 좋은 혼처를 구하기만 하면 이 어미가 무슨 걱정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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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abyr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