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손자병법과 함께 중국의 2대 병서인 오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오기는 76번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백전백승의 명장입니다. 

 '필생즉사, 필사즉생' 즉,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라는 유명한 명언도 오자병법에서 인용한 말이지요.
 오기는 오자라고 불리우며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불세출의 명장입니다.


 
오기는 위나라 사람으로 젊어서 동네의 젊은이 30여명을 죽인 죄로 고향을 떠나 증자의 문하에 입문하였지요.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오기가 장례식에 가지 않자 증자는 오기를 파문시켰지요.



 오기는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노나라의 장군이 되었는데,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자 오기는 장군이 될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사람이라는 점이 걸림돌이 되어 오기의 장군 임명이 불투명하게 되자 오기는 아내를 죽여 자신의 결백을 밝혔습니다.



 제나라와 아무 관련이 없음이 밝혀지자 오기는 장군이 되었고 장군이 된 오기는 제나라를 대파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아내를 죽인 탓인지 그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해 결국 해임되었고 오기는 위나라로 갔지요.

 오기를 장군으로 등용한 위나라는 오기의 모국이 아닌 진나라에서 분리된 삼진 중에 하나인 위나라였지요.



 당시 위나라의 군주인 문후는 오기를 중용하였고 오기는 서하의 태수가 되어 진나라와 싸워 연전연승하여 땅을 크게 넓혔습니다.

 장군이 된 오기는 병사들의 종기를 직접 빨아준 일화로 유명하고 진군할 때는 말을 타지 않고 병사들이 지는 짐을 지고 함께 걸었다고 합니다.


 오기는 병사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항상 병사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지요.

 문후가 죽고 이어 왕위에 오른 무후는 오기를 신임하였지만 무후는 전문을 재상에 임명하여 오기는 원했던 재상이 되지 못했지요.



 전문이 죽은 후에 재상이 된 공숙좌는 오기의 존재를 꺼려하여 오기가 무후의 신뢰를 잃게 만들기 위해서 계략을 세웠지요.

 공숙좌는 무후에게 오기는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위나라를 떠날지도 모르니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낼 것을 제안했습니다.

 무후는 공숙좌의 제안에 따라 공주를 오기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지만 이것은 오기와 무후를 이간시키려는 공숙좌의 음모였지요.

 

 

 공숙좌는 무후의 부마였는데, 계획적으로 아내인 공주를 화나게 만들어 오기가 보는 앞에서 아내인 공주가 자신을 꾸짖도록 만들었습니다.

 오기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서 공주를 화나게 만들었지요.

 공주가 공숙좌를 꾸짖는 모습을 보자 오기는 공주와 결혼하면 저렇게 남편이 아내한테 꼼짝 못하고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공주와 혼인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왕에게 공주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지요.

 

 

 오기의 청혼 거절은 이 사실을 모르는 공주를 화나게 만들었고 무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지요.

 공숙좌의 음모가 성공한 것이였지요.

 공주는 오기를 미워하였고 무후 역시 오기를 신뢰하지 않아 오기는 결국 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갔습니다.

 초나라의 도왕은 오기의 명성을 들어 오기를 재상에 임명하였지요.

 재상이 된 오기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초나라를 단숨에 최강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오기는 귀족들에게 세금을 더 내게 만들어 귀족들의 원한을 샀기 때문에
도왕이 죽자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오기를 죽이려 했습니다.

 오기는 도왕의 관에 엎드렸지요.
 귀족들은 오기를 죽이는데만 혈안되어 도왕의 관에 화살을 쏘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오기는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들의 화살이 도왕의 관을 맞추게 만들어 대역죄로 자신을 죽인 무리들이 멸문당하게 만드려고 그런 것으로 추측됩니다.

 결국 반란에 참여한 귀족들은 왕의 관에 화살을 쏜 죄로 멸문당했지요.

 오기는 죽으면서도 복수를 염두할 정도의 임기응변이 대단한 사람인 것 같네요.

 

 오기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출세를 위해서 아내를 죽인 일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가 많습니다.
 
하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장 중에 한 명인 오기의 저서 오자병볍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애독되고 있습니다.
 오기는 76전 64승 12무로 단 한번도 패하지 않는 불세출의 명장인데, 위험을 우릎쓰지 않은 장수로 유명합니다.
 확실한 승산이 없을 때는 공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76번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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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자서( ?  ~ B. C. 485)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사이자 가장 유명한 장수입니다.

 힘에 있어서는 삼국지의 여포에 못지않고 지략에 있어서는 제갈공명에 못지않은 힘과 지략을 겸비한 불세출의 명장이지요.
 오자서는 관우와 항우 등과 함께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웅입니다.

 젊은 시절에 고국인 초나라에서 자신의 가족을 모두 잃은 원한을 갚은 그의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여 오자서는 복수의 화신으로 유명하지요.

 하지만 결국에는 어리석은 군주 부차로부터 자결 명령을 받고 세상을 떠난 비운의 충신이기도 하지요.

 

 오자서는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그의 조상인 오거는 춘추오패 중 하나인 초나라의 장왕을 섬겨 명성을 얻었고 아버지 오사는 초나라 태자 건의 태부였습니다.

 당시 초나라 왕은 평왕이었는데, 미인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 간신 비무기의 말을 듣고 진나라에서 태자의 배필로 보낸 공주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였지요.

 

 태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보복을 두려워 한 비무기는 태자를 반역죄로 모함했고 어리석은 평왕은 태자를 의심하여 죽일 것을 명령하고 오사는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태자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신하가 태자를 도망치게 하자 비무기는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오자서의 아버지인 오사와 형인 오상과 오자서 모두 죽이려고 오사에게 두 아들이 오면 살려주겠다고 거짓말을 했지요.

 

 충신인 오사는 자식들까지 죽이려는 거짓말인 줄 알고도 왕의 명령으로 편지를 썼지만, 오자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실제로 고지식한 오상은 아들이 오면 아버지를 살려주겠다는 말이 거짓말임을 알고도 대의명분을 소중히 생각하여 가서 아버지와 함께 죽임을 당했지만 오자서는 탈출하였습니다.

 이 때 오자서의 머리카락이 하루만에 반백이 되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지요.

 

 탈출하는 길에 친구인 신포서를 만났는데, 오자서는 신포서에게 초나라를 반드시 멸하겠다고 말했고 신포서는 초나라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초나라를 탈출한 오자서는 태자 건과 함께 정나라에서 후대를 받은 후에 진나라에 갔는데, 진나라에서 태자 건을 이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려다가 사전에 음모가 발각되어 태자 건은 죽임을 당하였고 오자서는 어렵게 탈출하여 오나라에 갔습니다.

 

 오나라에 정착한 오자서는 왕이 되기를 원했던 공자 광을 만났고, 전제라는 장사를 공자 광에게 천거한 후에 자신은 은퇴하여 사태를 관망하였습니다.

 마침내 공자 광의 반란이 성공하여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오왕 합려입니다.

 오왕 합려는 오자서를 등용하였고 오자서는 장군이 되어 초나라에 대한 복수를 준비했지요.

 오자서는 장군이 된 후에 손자병법의 저자인 제나라 출신의 군사전략가 손무를 오왕 합려에 천거하였고 오왕 합려는 손무를 군사로 오자서를 대장군으로 등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오나라는 군사적인 전력은 초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열세였지만 오자서와 손무의 맹활약으로 초나라를 연파하여 수도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수도를 점령한 오자서는 이미 죽은 원수 평왕의 시체를 찾아 채찍으로 쳤는데, 신포서가 한 때 신하인자가 어찌 그럴 수 있냐고 항의하자 오자서는 '해는 저물어 가는데, 가야할 길은 멀다.'는 뜻을 전했다고 합니다.

 

 조국의 멸망을 지켜 볼수만은 없었던 신포서는 진나라에 가서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진나라의 왕인 애공은 초평왕이 태자의 배필로 간 자국의 공주를 취한 것을 원망하여 그동안 두 나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신포서의 청을 거절했지만 신포서가 7일동안 밤낮으로 구원을 청하며 울자 그의 충성심에 감격하여 대군을 보내 초나라를 도와 주었지요.

 표면상으로는 신포서의 충성에 감격해서 초나라를 구원한 것이지만 초나라 소왕의 어머니가 진나라 공주였기 때문에 초나라를 구원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진나라의 구원군에 사기가 오른 초나라는 오나라를 격파하였고, 이웃나라 월나라의 침략과 오왕 합려의 동생 부개의 반란으로 결국 오나라는 초나라 정복을 포기하고 화친조약을 맺었습니다.

 

 동생 부개의 난을 진압한 오왕 합려는 초나라와의 전쟁 중에 오나라를 공격한 월나라를 공격하였지만, 월나라의 명신 범려의 활약으로 패하였고 자신은 전쟁에서 당한 부상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지요.

 오왕 합려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부탁하였지만, 오왕 합려의 숙부인 계찰의 반대로 부차는 왕에 오르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오자서의 활약으로 부차는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자서의 활약으로 왕이 된 부차는 오자서에게 나라의 절반을 오자서에게 주려고 했지만 충신인 오자서는 이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나라는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오자서의 활약으로 크게 승리하였지만 부차는 월나라의 구천의 화친조약을 받아들여 후환을 남기게 되었지요.
 구천은 이후 오나라에 가서 오왕 부차를 섬겼지만, 자신의 아내까지 부차에게 바치며 부차의 환심을 사서 고국으로 돌아와 다시 월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이후 오자서는 부차에게 지금이라도 월나라를 치라고 말했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월나라의 명신 범려는 오자서의 행동에 불안을 느꼈는지 미녀 서시를 오나라에 보내어 부차의 환심을 샀지요.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녀라고 평가받고 있는 서시는 오왕 부차의 곁에서 월나라의 스파이로서 활약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시가 오나라에 온 후로 부차가 토목공사를 늘였고 부차가 충신인 오자서를 죽인 것도 서시의 이간책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초나라에서 망명 온 재상 백비는 월왕 구천의 뇌물을 받고 구천을 비호하고 오자서를 모함하였는데, 부차는 처음에는 백비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오자서가 멸문의 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맏아들을 제나라에 맡기고 오자 오자서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오해하여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령하였지요.

 오자서는 죽기 전에 부차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며 오나라가 머지 않아 멸망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하였습니다.

 

 실제로 월나라는 오자서가 죽은 후에 부차가 군대를 이끌고 나라를 비운 틈을 타서 오나라를 공격하여 태자를 죽였고, 그제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부차는 월나라와 화친조약을 맺었지만 국력의 기울어짐은 어쩔 수가 없어 결국 오나라는 월나라에 멸망당하였지요.

 부차는 죽기 전에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며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자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설에 의하면 부차가 총애했던 서시는 범려와 함께 월나라를 떠났다고 합니다.

 

 자신의 고국인 초나라에서 간신 비무기의 모함으로 모든 가족을 잃은 아픔을 당한 오자서는 망명 온 오나라에서도 간신 백비의 모함으로 자결하게 되었으니 오자서의 비참한 최후는 어리석은 군주에 충성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충신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습니다.

 

 진시황 시대에 가혹한 법을 만들어 유명한 이사 역시 간신 조고의 모함으로 일족이 멸문당하게 되자 자신의 충성심은 오자서만 못하고 자신이 섬긴 군주는 부차보다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비참한 최후는 어쩔 수 없다며 절망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요.

 이사는 어리석은 군주에게는 아무리 충성을 바쳐도 통하지 않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끝까지 진나라 2세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비참한 최후를 당하게 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탄식했던 것이지요.

 

 오자서가 죽기 전에 부차를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충신의 대명사처럼 여겨진 것은 이 시절만 해도 군주의 태도가 예전같지 않으면 떠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당시만 해도 군주가 자신을 예로서 대우하지 않거나 자신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군주를 떠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이 경우 배신으로 간주되지도 않았는데도 오자서는 끝까지 부차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게 된 것이지요.
 오자서와 동시대의 공자님께서도 조국인 노나라의 군주가 제나라의 미녀들에 빠져 정서를 돌보지 않자 노나라를 떠나셨었지요. 


 충성심과 용맹과 지략을 겸비했던 오자서는 중국의 황제들이 가장 원했던 이상적인 신하였지만 어리석은 군주 부차를 끝까지 섬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게 된 것이지요.

 오자서의 이야기는 나의 마음이 아무리 충성되고 진실하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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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어야 역사학자가 기록한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학자는 황제를 비롯한 집권층을 비난할 수 없어 기록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초한지 시대의 명장 한신의 죽음에 대해서 한신은 모반을 하다가 발각되어 죽었다고 쓰여있지만, 한신이 모반하였다기 보다는 한신이 모반죄를 뒤집어 쓰고 죽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이지요.

 사기의 여러 곳에서 한신이 모반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역사학자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 논란이 있어 정설은 아니지만, 과거 역사학자들은 한신이 모반을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과거의 역사학자들은 현재의 역사학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직감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사마천이 역사학자이면서도 위대한 사상가에 못지 않은 철학을 가진 것도 직감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입니다.
 자고로 역사학자는 직감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역사에 나오는 왕과 신하의 대화는 누가 기록했을까요?
 역사학자가 직접 들었을까요?
 진시황 시대의 승상 이사가 조고와 대화한 한 말을 사마천이 다 듣고 썼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은 역사학자의 상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많지요.
 
 승상 이사가 조고와 밀실에서 속삭인 말은 그 어떤 역사학자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사가 죽기 전에 탄식한 말도 역사학자의 상상이나 이사가 남긴 몇마디의 말을 역사학자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많지요.

 혹은 전해지는 이야기를 역사학자가 이건 이런 뜻일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쓰는 경우가 많지요.
 직감력이 없는 역사는 어떻게 될까요?

 과학적인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엉터리 역사책이 된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학자의 추측은 어떤 근거가 있기 때문에 70~80% 이상이 맞지만, 직감력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을 100% 확실하지 않다고 외면한다면 시간이 지나면 수수께기로 되어 버려 진실이 묻히기 때문이지요.

 세상의 모든 역사는 100% 확실한 것만 쓰인 것이 아닙니다.
 특히 모반 등이나 후계자 문제에 대한 밀실에서의 이야기는 역사학자가 도저히 들을 수 없거나 기록으로 남을 수도 없는 이야기가 많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책으로 남아 전해지는 것은 누군가가 상상을 동원해서 쓴 것이지요.
 상상을 동원한 것이 무슨 역사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과학의 가설도 50%도 맞지 않을 가능성이 많지요.
 지식이라는 것은 원래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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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부침주의 각오로 싸우겠다." 

 얼마전에 허정무 감독이 파부침주의 각오로 싸우겠다고 말해 파부침주라는 고사가 유명해졌습니다.

 파부침주란 초나라의 항우가 진나라와 거록에서 싸우기 전에 배를 가라앉히고 솥을 깨뜨린 후에 진나라를 공격하여 이긴 고사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항우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항우가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파부침주의 고사를 살펴보겠습니다.

 항우는 파부침주의 고사를 만든 거록대전에서 불과 3만 병력으로 진나라의 20만 대군과 싸워 이겼는데, 당시 진나라의 장수는 명장 장한으로 명장을 상대로 7 대 일에 가까운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이겼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승리였습니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항우가 승리한 요인으로 초나라 병사들의 일당십의 용맹과 선봉에 선 경포 장군의 용맹을 꼽았는데, 무엇보다 초나라 병사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준 항우의 카리스마적인 리더쉽이 결정적인 승리의 요인이었습니다.
 불과 25살이었던 항우는
 병사들과 같은 짐을 들고 함께 행군하면서 배고픈 병사에게 자신의 먹을 것을 주고, 추위를 떠는 병사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아픈 병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자상한 행동으로 병사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항우는 대장군 송의가 진군과 싸울 생각을 하지 않자 송의의 목을 베고 지휘권을 빼았을 수 있었지요. 그 후에 초왕에 의해서 대장군으로 임명된 항우는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넌 후에 배를 가라앉혀 병사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만든 후에 솥을 때려 부수고 3일분의 식량만 배급하여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초나라 병사들은 도망쳐도 돌아갈 배도 없었고, 식량도 없어 '필사즉생, 필생즉사'(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의 정신으로 용맹하게 싸워 이길 수 있었지요.

 
 
항우가 불과 수만의 병력으로 명장 장한의 20만 대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의 강점인 용맹함으로 적군의 약점이었던 용도를 끊었기 때문입니다.
 
용도는 식량이나 물자를 보급하는 보급로로 용도가 끊긴 진군은 필사적으로 용도를 되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연전연패하였고 승세를 타고 공격해온 초나라에 패하여 결국 퇴각하였지요.
 항우가 이끄는 초군은 9전 전승을 거두었고, 9전 전패를 기록한 진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초나라는 정도에서 진장 잔한에게 참패하여 항우의 숙부인 항량이 전사하고 주력부대가 괴멸되는 등 멸망의 위기에 빠졌지만, 항우는 거록에서 수만의 병력으로 진나라의 명장 장한의 20만 대군을 격파하여 패망의 위기에 있던 초나라를 구하고 결국 진나라는 초나라의 다른 장수 유방(훗날 고조)에게 항복하여 멸망하였습니다.


 항우는 초나라의 전설적인 명장 항연의 손자로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명성을 얻었고 겨우 23살의 나이에 숙부인 항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항량이 진나라의 명장 장한에게 참패하여 초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항우는 겨우 수 만의 병력을 이끌고 명장 장한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격파하여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지요.

 거록에서 진군을 이끈
장한은 진나라 말기의 뛰어난 명장인데, 항우와 유방과 한신이 모두 장한을 명장이라고 말한 기록이나, 그가 연전연승 중이었던 항량을 대파하여 전사시킨 것과 항우가 이끌었던 40만 대군을 20만의 병력으로 대등한 싸움을 한 것이나, 파죽지세로 진나라 수도까지 진격했던 진승의 난을 쉽게 진압했다는 기록을 보면 정말 대단한 명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신의 주군이었던 한고조 유방은 팽월의 맹활약이 없었다면 한신이 항우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는 팽월의 부장 난포의 의견에 동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항우와 한신에 대해서 한고조 유방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지요.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항우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한신보다 더 뛰어난 명장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쩌면 한신은 로마의 스피키오 장군이 군사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카르타고의 한니발을 대파하였지만 승리에도 불구하고 하니발이 더 위대한 명장으로 평가받는 것처럼 두 배 이상 많은 병력으로 항우를 이겼으니 이긴 한신보다 패한 항우가 더 위대한 명장이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항우는 해하의 전투에서 패함으로 그의 70전 무패라는 기록이 깨지면서 자신을 최초로 격파한 한신에게 화려했던 명성을 빼았긴 것이 아닌가 싶네요. 하지만 천재성에 있어 항우를 따를 사람은 중국 역사상 그 누구도 없을 것입니다.


 항우는 25세의 나이로 초나라 대장군이 되서 거록에서 진나라의 명장 장한의 20만 대군을 격파했고 해하에서 패하여 자결했을 때, 그의 나이가 불과 30세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항우는 미완성의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항우는 20살에 왕이 되어 33세에 죽은 서양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는 알렉산더 대왕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우가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알렉산더 대왕처럼 대제국을 세웠을지도 모르지요.

 

 해하의 전투에서 패한 항우는 불과 28명의 병사를 이끌고 관영 장군이 이끄는 5000 기병을 대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처럼 한나라의 병사들은 항우를 두려워 했기 때문에 항우가 좀 더 적극적으로 선제 공격을 했다면 승부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만약 항우가 해하의 전투에서 패한 후에 오강을 건너 고향으로 도망친 후에 재기하였다면 유방의 천하통일은 불가능하였겠지요.
 그 이유는 항우가 비록 해하에서 패하였다고 해도 초나라 백성들은 항우를 여전히 따랐고 항우의 지지 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에 항우는 재기할 수 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우는 천하의 명장이기 때문에 한신이 수 십만 대군을 동원한다고 해도 강이라는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한다면 한신도 어쩔 수 없었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항우는 고향의 8000여 명의 젊은이들을 죽게 만들어 고향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항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이야기지만 항우의 이러한 여린 마음은 그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지요.

 항우는 해하의 싸움에서 한신에게 패한 후에 한군에 쫒겨 자결하였습니다.
 항우가 한신에게 패한 것은 병력이 한신의 절반(한신 20만, 항우 10만)밖에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항우의 초나라 병사들이 오랜 전투로 지쳤는데다 사면초가라는 한신의 기가 막힌 심리전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팽성의 전투에서 불과 3만의 병력으로 한나라의 56만 대군을 격파한 일은 중국 전쟁사상 최고의 승리라는 평가지요.
 
아무리 한신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고 해도 항우의 병사들을 이끄는 카리스마에 적군을 압도하는 용맹과 무용은 한신조차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항우가 배를 타고 탈출했다면 천하를 유방이 차치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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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당대 최고의 명장 항우를 해하에서 대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한신이 없었다면 유방의 천하통일은 불가능한 일이였을 것이고 항우는 어쩌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받았을지 모르지요.

 한신은 한나라가 팽성에서 대패하여 위기에 몰렸을 때, 위, 대, 조, 제를 차례로 정복하여 불리했던 초한전을 한나라가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마지막으로 해하에서 항우가 이끄는 초군을 대파하여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지요.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신이 이긴 적장들이 모두 뛰어난 장군이였다는 점입니다.

 항우는 당대 무적이였고 장한, 위표, 진여, 용저 등도 모두 쉬운 상대가 아니였지요.

 특히 장한은 진나라 시절 항우의 삼촌 항량의 초군을 대파하여 초나라를 위기에 빠뜨렸었고 20만 대군으로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의 40만 대군의 진격을 막아 항우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명장이였지만, 한신이 명장 장한을 상대로 숫적인 열세에도 큰 어려움 없이 장한을 대파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 명장인지 알 수 있지요.

 진여는 수만 병력으로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의 20만 대군의 공격을 잘 막아 조나라를 구원온 항우가 장한을 격파하는데에 큰 공을 세운 지장이였지요.

 진여의 조군이 쉽게 무너졌다면 아마도 항우는 거록에서 진나라를 이기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적들을 큰 난관없이 대파했다는 사실은 한신이 얼마나 뛰어난 명장인지 잘 알 수 있게 하지요.
 그리고 한신이 이전에 대군을 지휘한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장군이 된 얼마 후에 명장 장한을 격파한 사실은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였는지 알 수 있게 하지요.


 

 한신은 초나라 회음 출신으로 무명 시절에 가난하게 살았는데, 회음에서 낚시하고 있을 때에 어떤 부인이 그가 배고픈 것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며칠 동안 밥을 주니 한신은 그 부인에게 언젠가는 보답하겠다고 말했고 훗날 초나라 왕이 된 한신은 정말 그녀를 찾아 큰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언젠가 한신은 어느 정장의 집에 기거한 적이 있는데 그의 부인이 밥을 주지 않아 화가 나서 나갔지만, 한신은 초나라 왕이 된 후에 그녀를 꾸짖으면서도 그녀에게 벌을 주지 않고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회음의 젊은이들 중 한 건달이 한신을 모욕하면서 가랭이 밑으로 기어가라고 하자 한신은 정말 가랭이 밑을 기어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한신을 겁쟁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한신은 나중에 초나라 왕이 된 후에 이 건달을 찾아내어 벌을 준 것이 아니라 상을 준 후에 중위에 임명했다고 합니다.

 한신은 그 때의 굴욕을 참은 것이 결국 현재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했지요.

 이처럼 한신은 상대가 자신을 악으로 대했다고 해도 결국 덕을 봤다면 상을 줄 정도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 크게 보답하는 성격이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한신의 성격은 결국 자신에게 은혜를 배푼 유방의 의심을 샀으면서도 배신을 하지 못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항양이 반란을 일으키자 한신은 그의 휘하에 있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항양이 패사한 후에 항우의 휘하에 있게 되었지만, 항우는 한신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를 중용하지 않아 한신은 한으로 도망쳤지요.

 여기서 항우가 어째서 한신을 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장은 명장을 알아 본다는 말이 있듯이 명장인 항우가 한신의 계책을 들어 보면 한신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우가 한신을 중용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힘든 점이지요.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한신은 적을 유인하는 계책을 올렸지만 용맹한 항우는 적을 유인하는 작전을 좋아하지 않아 한신의 계책을 받아 들이지 않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아무튼 한에 와서도 인정받지 못한 한신은 우연히 법을 어겨 죽게 되었는데, 등공이 다행히 지나가다 한신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한신을 살려 주었다고 합니다.

 등공은 한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유방에게 추천하였지만 유방은 그를 중용하지 않았지요.
 한나라 승상 소하 역시 한신의 재능을 알고 유방에게 추천하였지만 등용되지 않자 한신은 결국 도망쳤는데, 소하는 한신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뒤쫓아 가서 한신을 데리고 왔습니다.
 유방은 소하까지 도망친 줄 알고 크게 낙담했는데, 소하가 한신을 붙잡으려고 떠났었다고 말하자 유방은 소하를 생각해서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지요. 


 소하의 의견에 따라 성대한 대장 임명식을 했고 임명식이 끝난 후에 유방은 한신의 계략에 따라 동진하여 삼진을 평정한 후에 제와 조와 연합하여 무려 56만 대군으로 초를 공격하여 팽성에 진입하였으나 수 만에 불과한 항우의 초군에 대패하였지요.

 하지만 한신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초군의 공격을 막았지요.
 56만이나 되는 연합군이 수 만에 불과한 항우의 초군에 참패하자 제, 조, 위가 한을 배신하여 전세는 한나라에 불리하게 되었지요.



 이에 한신은 위를 공격하여 위를 평정한 후에 장이와 함께 조와 대를 공격하게 하였지요.

 한신이 대를 평정한 후에 조를 공격하자 조의 장군 진여는 20여만의 군사를 집결시켰는데, 참모인 이좌거는 연전연승으로 기세가 오른 한나라와 정면으로 싸우지 말고 자신에게 3만의 병력을 주면 보급로를 차단시키겠다고 했지만 진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한신은 진여가 이좌거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첩자를 통해서 듣고 크게 기뻐하며 2000여명을 선발하여 산에 숨어 있다가 조군이 성벽을 비우면 조의 성벽으로 들어가 한의 깃발을 세울 것을 명령했지요.
 한신은 이 때 그 유명한 배수진을 쳤습니다.

 한군이 배수진을 치자 조군이 병법도 모른다고 비웃었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한군의 위세에 눌려 조군은 진지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미 성벽은 한나라 깃발이 가득했지요.

 한신의 명령에 따라 2000여명의 한군은 조군이 성벽을 비운 틈을 타서 성벽을 차지 한 후에 수많은 깃발을 꽂아 대군이 성벽을 차지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갑자기 대군이 나타난 것으로 착각한 조군이 놀라 도망치자 한군은 조군을 대파하여 진여를 죽이고 조왕을 사로 잡았지요.
 한신은 생포한 이좌거를 풀어주고 그를 스승의 예로써 대한 후에 계책을 물었습니다. 한신은 기세를 몰아 연나라나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이좌거는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지 말고, 지친 병사들을 쉬게 한 후에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설득할 것을 충고했습니다. 한신은 이좌거의 계책에 따라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잔치를 배푼 후에 연나라에게 항복을 권유하자 연나라는 항복하였습니다.


 한신이 조를 정복하는 동안에 항우는 유방을 공격하였습니다.
 유방은 패하여 도망쳐 조에 도착하였지만 한신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한의 사자라고 속인 후에 대장의 인부를 빼았은 후에 한신에게 제를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지요.

 한신이 병사를 이끌고 제를 공격하기 전에 한왕이 역이기를 보내 제를 설득하여 항복시켰지요.
 
한신은 공격을 중지하려고 했지만, 괴통이라는 자가 조칙을 받았으니 계속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고 한신이 괴통의 말대로 제를 공격하자 제왕은 역이기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여 역이기를 죽인 후에 초에 구원을 청하자 항우는 용저에게 20만 병력을 내주어 제를 구원하였습니다.
 제와 초가 연합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한군과 대치하였는데, 한신은 밤새 일만 개 이상의 모래 주머니를 만들어 강의 상류를 막은 후에 강을 건너 용저를 공격하다가 패한 척하고 후퇴했습니다.

 용저는 한신이 겁을 먹고 도망치는 줄 알고 추격하여 강을 건넜는데, 이 때에 한군이 모래주머니를 터 놓아 강물이 거세지니 혼란에 빠진 초군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용저를 죽였습니다.



 항우는 용저가 20만 대군을 잃고 죽자 한신을 크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한신을 포섭하려고 했지만 한신은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초의 사자가 가자 괴통이 한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히지 말고 독립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한신은 고심하면서도 괴통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한신은 제를 정복한 후에 유방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이 제의 가왕이 될 것을 청하였는데, 당시 유방은 항우가 이끄는초군에 패하여 한신의 구원을 기다리는 상황이였기 때문에 몹시 화가 났지만 한신의 변심을 우려하여 제왕이 될 것을 허락했지요.



 제왕이 된 한신은 군대를 이끌고 유방을 구원하여 초군의 공격을 막았습니다.

 한신이 유방을 구원하자 초군과 한군은 결국 휴전을 맺었는데, 전세가 유리하다고 판단한 장량의 진언에 따라 유방은 초군을 공격했지만 초군의 반격에 패하여 한신과 팽월에게 출병을 명령하였지요.

 하지만 이들이 출병에 응하지 않자 유방은 이들에게 천하통일 후 다스릴 지역을 약속하였고 드디어 한신과 팽월은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였는데, 한신과 팽월의 이러한 이해타산적인 출병이 훗날 이들의 숙청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지요.

 
한신이 이끄는 한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하에서 초군을 대파하여 초한전을 종식시켰는데, 이때 한신은 '사면초가'의 심리전을 이용했지요.

 사방에서 초가를 부르게 하여 초군의 사기를 떨어뜨렸지만 용맹한 초군은 대부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고 합니다.

 만약 '사면초가'의 전술로 초군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용맹한 초군을 어떻게 이겼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해하의 전투에서 한신에게 참패한 항우는 자결하였고 결국 유방은 진나라 이후 나누어졌던 중국을 재통일하였지요.



 천하를 평정한 한왕은 한신을 초나라 왕에 봉하였습니다.

 하지만 한신이 다스렸던 초나라는 과거의 초나라를 여러 지역으로 나눈 것이였지요.
 한신이 초나라 왕이 된 후에 친구였던 종리매가 망명왔는데, 그는 항우의 맹장으로 만약 한신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면 한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은 것이였지요.

 이때, 누군가 한신이 모반했다고 밀고하였는데, 한신이 모반했다고 오해한 유방은 진평의 계략에 따라 제후들을 소집하자 한신은 소집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한신은 종리매의 목을 바치면 자신의 결백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여 종리매의 목을 들고 갔지만 유방은 그를 체포했지요.
 
유방은 한신의 무죄가 밝혀졌음에도 초나라 왕의 지위를 빼았고 회음후로 봉했습니다.
 
실망한 한신은 유방을 원망하여 입궐하지 않았고 유방은 한신을 철저히 감시하였다고 합니다.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여태후는 유방이 진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떠난 틈을 타서 한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죽였습니다.
 하늘이 한신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했는데, 한신이 죽은 후에 강한 천둥이 쳤다고 전해집니다.


Posted by labyr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