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명장 한신

세계사 2010. 8. 15. 07:00


 한신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당대 최고의 명장 항우를 해하에서 대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한신이 없었다면 유방의 천하통일은 불가능한 일이였을 것이고 항우는 어쩌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받았을지 모르지요.

 한신은 한나라가 팽성에서 대패하여 위기에 몰렸을 때, 위, 대, 조, 제를 차례로 정복하여 불리했던 초한전을 한나라가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마지막으로 해하에서 항우가 이끄는 초군을 대파하여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지요.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신이 이긴 적장들이 모두 뛰어난 장군이였다는 점입니다.

 항우는 당대 무적이였고 장한, 위표, 진여, 용저 등도 모두 쉬운 상대가 아니였지요.

 특히 장한은 진나라 시절 항우의 삼촌 항량의 초군을 대파하여 초나라를 위기에 빠뜨렸었고 20만 대군으로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의 40만 대군의 진격을 막아 항우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명장이였지요.

 한신이 명장 장한을 상대로 숫적인 열세에도 큰 어려움 없이 장한을 대파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 명장인지 알 수 있지요.

 진여는 수만 병력으로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의 20만 대군의 공격을 잘 막아 조나라를 구원온 항우가 장한을 격파하는데에 큰 공을 세운 지장이였지요.

 진여의 조군이 쉽게 무너졌다면 아마도 항우는 거록에서 진나라를 이기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적들을 큰 난관없이 대파했다는 사실은 한신이 얼마나 뛰어난 명장인지 잘 알 수 있게 하지요.

 그리고 한신이 이전에 대군을 지휘한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장군이 된 얼마 후에 명장 장한을 격파한 사실은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였는지 알 수 있게 하지요.

 

 한신은 초나라 회음 출신으로 무명 시절에 가난하게 살았는데, 회음에서 낚시하고 있을 때에 어떤 부인이 그가 배고픈 것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며칠 동안 밥을 주니 한신은 그 부인에게 언젠가는 보답하겠다고 말했고 훗날 초나라 왕이 된 한신은 정말 그녀를 찾아 큰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언젠가 한신은 어느 정장의 집에 기거한 적이 있는데 그의 부인이 밥을 주지 않아 화가 나서 나갔지만, 한신은 초나라 왕이 된 후에 그녀를 꾸짖으면서도 그녀에게 벌을 주지 않고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회음의 젊은이들 중 한 건달이 한신을 모욕하면서 가랭이 밑으로 기어가라고 하자 한신은 정말 가랭이 밑을 기어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한신을 겁쟁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한신은 나중에 초나라 왕이 된 후에 이 건달을 찾아내어 벌을 준 것이 아니라 상을 준 후에 중위에 임명했다고 합니다.

 한신은 그 때의 굴욕을 참은 것이 결국 현재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했지요.

 이처럼 한신은 상대가 자신을 악으로 대했다고 해도 결국 덕을 봤다면 상을 줄 정도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 크게 보답하는 성격이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한신의 성격은 결국 자신에게 은혜를 배푼 유방의 의심을 샀으면서도 배신을 하지 못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항양이 반란을 일으키자 한신은 그의 휘하에 있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요.

 항양이 패사한 후에 항우의 휘하에 있게 되었지만, 항우는 한신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를 중용하지 않아 한신은 한으로 도망쳤지요.

 여기서 항우가 어째서 한신을 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장은 명장을 알아 본다는 말이 있듯이 명장인 항우가 한신의 계책을 들어 보면 한신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우가 한신을 중용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힘든 점이지요.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한신은 적을 유인하는 계책을 올렸지만 용맹한 항우는 적을 유인하는 작전을 좋아하지 않아 한신의 계책을 받아 들이지 않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아무튼 한에 와서도 인정받지 못한 한신은 우연히 법을 어겨 죽게 되었는데, 등공이 다행히 지나가다 한신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한신을 살려 주었다고 합니다.

 등공은 한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유방에게 추천하였지만 유방은 그를 중용하지 않았지요.
 한나라 승상 소하 역시 한신의 재능을 알고 유방에게 추천하였지만 등용되지 않자 한신은 결국 도망쳤는데, 소하는 한신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뒤쫓아 가서 한신을 데리고 왔지요.
 유방은 소하까지 도망친 줄 알고 크게 낙담했는데, 소하가 한신을 붙잡으려고 떠났었다고 말하자 유방은 소하를 생각해서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지요. 

소하의 의견에 따라 성대한 대장 임명식을 했고 임명식이 끝난 후에 유방은 한신의 계략에 따라 동진하여 삼진을 평정한 후에 제와 조와 연합하여 무려 56만 대군으로 초를 공격하여 팽성에 진입하였으나 수 만에 불과한 항우의 초군에 대패하였지요.

 하지만 한신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초군의 공격을 막았지요.
 56만이나 되는 연합군이 수 만에 불과한 항우의 초군에 참패하자 제, 조, 위가 한을 배신하여 전세는 한나라에 불리하게 되었지요.

 이에 한신은 위를 공격하여 위를 평정한 후에 장이와 함께 조와 대를 공격하게 하였지요.
 한신이 대를 평정한 후에 조를 공격하자 조의 장군 진여는 20여만의 군사를 집결시켰는데, 참모인 이좌거는 연전연승으로 기세가 오른 한나라와 정면으로 싸우지 말고 자신에게 3만의 병력을 주면 보급로를 차단시키겠다고 했지만 진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한신은 진여가 이좌거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첩자를 통해서 듣고 크게 기뻐하며 2000여명을 선발하여 산에 숨어 있다가 조군이 성벽을 비우면 조의 성벽으로 들어가 한의 깃발을 세울 것을 명령했지요.
 한신은 이 때 그 유명한 배수진을 쳤습니다.

 한군이 배수진을 치자 조군이 병법도 모른다고 비웃었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한군의 위세에 눌려 조군은 진지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미 성벽은 한나라 깃발이 가득했지요.

 한신의 명령에 따라 2000여명의 한군은 조군이 성벽을 비운 틈을 타서 성벽을 차지 한 후에 수많은 깃발을 꽂아 대군이 성벽을 차지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갑자기 대군이 나타난 것으로 착각한 조군이 놀라 도망치자 한군은 조군을 대파하여 진여를 죽이고 조왕을 사로 잡았지요.
 한신은 생포한 이좌거를 풀어주고 그를 스승의 예로써 대한 후에 계책을 물었지요.

 한신은 이좌거의 계책에 따라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잔치를 배푼 후에 연나라에게 항복을 권유하자 연나라는 항복하였습니다.
 한신이 조를 정복하는 동안에 초군이 갑자기 유방을 공격하자 유방은 패하여 도망쳐 조에 도착하였지만 한신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한의 사자라고 속인 후에 대장의 인부를 빼았은 후에 한신에게 제를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지요.
 한신이 병사를 이끌고 제를 공격하기 전에 한왕이 역이기를 보내 제를 설득하여 항복시켰지요.

 한신은 공격을 중지하려고 했지만, 괴통이라는 자가 조칙을 받았으니 계속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고 한신이 괴통의 말대로 제를 공격하자 제왕은 역이기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여 역이기를 죽인 후에 초에 구원을 청하자 항우는 용저에게 20만 병력을 내주어 제를 구원하였습니다.

 제와 초가 연합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한군과 대치하였는데, 한신은 밤새 일만 개 이상의 모래 주머니를 만들어 강의 상류를 막은 후에 강을 건너 용저를 공격하다가 패한 척하고 후퇴했습니다.

 용저는 한신이 겁을 먹고 도망치는 줄 알고 추격하여 강을 건넜는데, 이 때에 한군이 모래주머니를 터 놓아 강물이 거세지니 혼란에 빠진 초군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용저를 죽였습니다.

 항우는 용저가 20만 대군을 잃고 죽자 한신을 크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한신을 포섭하려고 했지만 한신은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초의 사자가 가자 괴통이 한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히지 말고 독립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한신은 고심하면서도 괴통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한신은 제를 정복한 후에 유방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이 제의 가왕이 될 것을 청하였는데, 당시 유방은 항우가 이끄는초군에 패하여 한신의 구원을 기다리는 상황이였기 때문에 몹시 화가 났지만 한신의 변심을 우려하여 제왕이 될 것을 허락했지요.

 제왕이 된 한신은 군대를 이끌고 유방을 구원하여 초군의 공격을 막았습니다.

 한신이 유방을 구원하자 초군과 한군은 결국 휴전을 맺었는데, 전세가 유리하다고 판단한 장량의 진언에 따라 유방은 초군을 공격했지만 초군의 반격에 패하여 한신과 팽월에게 출병을 명령하였지요.

 하지만 이들이 출병에 응하지 않자 유방은 이들에게 천하통일 후 다스릴 지역을 약속하였고 드디어 한신과 팽월은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였는데, 한신과 팽월의 이러한 이해타산적인 출병이 훗날 이들의 숙청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지요.

 한신이 이끄는 한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하에서 초군을 대파하여 초한전을 종식시켰는데, 이때 한신은 '사면초가'의 심리전을 이용했지요.

 사방에서 초가를 부르게 하여 초군의 사기를 떨어뜨렸지만 용맹한 초군은 대부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고 합니다.

 만약 '사면초가'의 전술로 초군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용맹한 초군을 어떻게 이겼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해하의 전투에서 한신에게 참패한 항우는 자결하였고 결국 유방은 진나라 이후 나누어졌던 중국을 재통일하였지요.

 천하를 평정한 한왕은 한신을 초나라 왕에 봉하였습니다.

 하지만 한신이 다스렸던 초나라는 과거의 초나라를 여러 지역으로 나눈 것이였지요.
 한신이 초나라 왕이 된 후에 친구였던 종리매가 망명왔는데, 그는 항우의 맹장으로 만약 한신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면 한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은 것이였지요.

 이때, 누군가 한신이 모반했다고 밀고하였는데, 한신이 모반했다고 오해한 유방은 진평의 계략에 따라 제후들을 소집하자 한신은 소집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한신은 종리매의 목을 바치면 자신의 결백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여 종리매의 목을 들고 갔지만 유방은 그를 체포했지요.

 유방은 한신의 무죄가 밝혀졌음에도 초나라 왕의 지위를 빼았고 회음후로 봉했습니다.

 실망한 한신은 유방을 원망하여 입궐하지 않았고 유방은 한신을 철저히 감시하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때에 한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던 것이 아닐지요.

 사기의 회음후 열전에는 한신이 진희와 함께 모반을 하려다 발각이 되어 처형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다른 열전에는 진희가 처벌을 두려워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둘 중 하나는 진실이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한신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한신을 죽이기 위해서 날조한 것일 가능성이 높지요.

 한신이 철저히 감시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신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도 아니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한신의 반란을 밀고한 자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고 그가 어떤 상을 받았는지도 기록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한신의 모반에 대해서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지요.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한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후환이 두려워서 사실대로 기술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기 열전에 진희가 처벌이 두려워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했으면서도 회음후 열전에서는 한신이 진희와 모반을 공모했다고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진실을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지요.

 이 밖에도 사마천은 한신이 괴통의 말을 들어 망했다고 했는데, 이 말은 한신이 괴통의 괴변을 듣고 항복한 제를 공격하여 유방의 신임을 잃었고 결국 숙청당했다는 뜻이 아닐지요.

 한신이 처형당하기 전에 아녀자에게 속아서 죽게 되었다고 탄식하면서 죽었다는 기록 역시 한신이 모반을 계획하지 않았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한신은 연금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자신이 스스로 찾아가지 않았다면 어쩌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한신은 한나라 장군들과 병사들에게 존경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잘못없는 한신을 무턱대고 죄를 뒤집어 씌여 죽일 수는 없었겠지요.

 하지만 한신은 여태후에 속아 자기 발로 입궐했고 여태후는 한신을 즉시 처형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정황이나 사마천이 남긴 기록을 보면 아마도 한신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지요.

 한신 뿐 아니라 팽월을 비롯한 다른 많은 무장들이나 많은 왕들이 반란에 연루되어 숙청당했다는 역사적인 사실 역시 한신이 억울하게 숙청당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 주는 것이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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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3대 악녀 중에 한명인 여태후는 한나라의 초대황제 고조 유방이 죽자 그가 사랑했던 후궁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거나 죽였다고 하는데, 황제의 여자들을 이토록 혹독하게 대한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지요.

 여태후는 척부인을 몹시 미워했는데 이는 척부인이 고조의 사랑을 독차지 했을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 여의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장자방을 비롯한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한 후에 고조는 여태후가 척부인과 그녀의 아들 여의를 해칠 수 없도록 믿을 수 있는 신하에게 그를 부탁했지만,  여태후는 척부인을 감금한 후에 마침내 여의를 독살합니다.

 이후에 척부인의 혀와 사지를 절단 한 후에 측간에 두어 그녀에게 인간돼지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아들인 혜제에 척부인을 보여주자 혜제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인생을 술에 빠져서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혜제가 술에 빠져 지내자 여태후는 자신의 반대 세력을 쫓아 내거나 죽인 후에 자신의 지지세력과 친척들을 대거 기용해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친척인 번쾌 장군 등을 중용하는 반면에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신하들은 해임했지요.

 혜제가 죽자 이후 여러 황제를 옹립했는데, 이런 일화가 있다고 합니다.

 여태후는 황제를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 황제의 어머니를 죽였는데, 이 사실을 황제가 알자 그 황제마저 죽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러 황제를 마음대로 내세웠던 여태후는 자신의 친척들을 왕으로 옹립했고 이에 고조를 섬겼던 신하들은 여씨 세력을 숙청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여태후가 죽자 고조의 신하들은 여씨들에 선전포고 했고 여씨들은 권력을 포기하겠다고 했지만 고조의 신하들은 이들을 끝내 숙청해서 여태후의 친척들은 대다수가 숙청되었지요.

 그 당시 여씨들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태후가 죽자 여씨들은 분열하여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지요. 이어서 황제에 오른 문제는 남은 여씨의 세력을 모두 숙청함으로 여씨들은 멸문을 당하고 맙니다.

 

 측천무후는 자신과 대립했던 친자식을 죽였는데, 여태후가 자신을 반대했던 혜제를 죽이지 않은 것에 비하면 훨씬 더 악독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측천무후 역시 고종 시대 자신의 경쟁 상대였던 후궁들을 무참히 죽였는데, 자신을 궁궐에 입궁시킨 황후마저 잔인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마음에 드는 신하들하고 바람 핀 것으로도 악명 높지만, 시대가 변하다 보니 지금와서 그것을 악한 행동이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네요.

 측천무후는 자신과 권력을 다툰 아들을 죽인 것으로 유명한데, 황후가 되기 전에는 황후를 모함하기 위하여 갓태어난 자신의 딸을 죽여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식조차 희생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악인은 많지만 반항할 힘조차 없는 갓태어난 자식을 희생시키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지요.

 
 반면에 여태후는 아들인 혜제의 권력을 빼았지 않았는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여태후는 벽양후 심이기를 총애했는데(아마도 불륜관계인듯) 혜제가 노하여 벽양후를 죽이려 하자 부끄러워 하여 벽양후를 변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록 당시에도 권력을 휘둘렀지만 혜제가 여태후가 총애하는 신하를 옥에 가둔 것으로 보아서 혜제가 허수아비 황제는 아니였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측천무후는 자식을 죽인 어머니이니 여태후보다 훨씬 더 악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여태후는 비록 자신의 정적들은 무참히 죽였지만 반대로 자신이나 고조에게 충성을 바쳤던 신하들은 우대하였는데, 고조의 충신들을 숙청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어 훗날 여씨들이 멸문당했으니 여태후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잘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여태후의 특이한 점은 고조의 후궁들 중 고조의 사랑을 받지 못한 후궁들을 우대했다는 점인데, 그들을 불쌍히 여겼을 뿐 아니라 우대했으며 그들을 만나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고 합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기록은 고조의 자식을 낳은 궁안의 여성들은 대부분 홀대를 받았지만 문제의 어머니인 박태후는 자식을 낳은 후에 버림받았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우대했다고 합니다.

 여태후가 고조에게 버림받은 여성들을 우대한 사실은 여태후의 다른 일면을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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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4대 미녀 중에 한명인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 시대의 미녀로 원제의 후궁으로 입궁하였지만, 그녀는 아주 이상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부름을 받지 못했는데 여기에 대해선 여러 가지 추측들이 있읍니다.

 그 중 하나가 처음부터 그녀가 원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게 황후 세력이 손을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지요.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당시 궁녀들의 얼굴을 그려 황제에게 바쳤던 화공 모연수가 왕소군이 자신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서 그녀의 얼굴을 추하게 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지만 일개 화공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황후나 특정 권력층의 사주를 받았던 것이 아닐지요.

 만약 그녀가 원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되서 아들을 낳는다면 권력의 구도가 바뀌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한 특정 세력이 원제가 그녀를 보지 못하게 방해했을 가능성이 높지요.



 아무튼 왕소군은 원제가 그녀를 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궁궐 생활을 하다가 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간택되어 선우의 왕비가 됩니다.

 당시 한나라는 흉노와 화친하기 위해서 한나라의 공주를 흉노의 선우(왕)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황제가 베푸는 연회에서 호한야 선우는 공주가 아닌 황제의 궁녀 중에서 아내를 맞이 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한나라는 궁녀들 중 빼어난 미녀들을 골라내어 호한야 선우가 선택할 수 없도록 만들었지만 이 중에 왕소군은 빠져 버렸읍니다.

 원제는 호한야 선우에게 연회를 베풀며 연회에 나온 궁녀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했고 흉노의 선우는 왕소군을 보자 그녀를 달라고 청하였지요.

 원제는 왕소군의 빼어난 미모를 보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읍니다.

 결국 왕소군은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지요.

 앞서 언급했 듯이 화공 모연수는 이 일(왕소군을 추하게 그린 일)에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았지만 일개 화공이 그런 일을 했다기 보다는 어떤 특정 세력이 왕소군이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게 방해한 일이라고 추측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요.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신하가 원제가 미색에 빠져 나라를 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랬다는 설, 흉노의 선우를 미색으로 현혹하여 흉노의 국력을 약화시킨 후에 흉노를 공격하려고 했다는 설, 일종의 스파이로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보냈다는 설, 평화사절로써 그녀를 시집보냈다는 설, 원제의 황후나 황후의 세력이 왕소군이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게 방해했다는 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원제의 황후나 황후의 세력이 왕소군이 원제의 총애를 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보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 것 같습니다.

 왕소군이 흉노로 떠난 후에 원제는 병으로 죽고 수십년 후에 황후의 조카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했으니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간 의혹은 없을수가 없지요.

 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간 왕소군은 선우의 총애를 받았지만, 얼마되지 않아 호한야 선우가 죽은 후에는 호한야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와 재가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흉노는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여자들을 물려 받는 이상한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한인이였던 왕소군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흉노에 시집간 후에 행복하게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흉노의 선우에게 사랑을 받았으니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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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4대 미녀란 중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4명의 미인을 말하는 것으로 춘추시대의 월나라 서시, 전한 시대의 왕소군, 후한(삼국) 시대의 초선, 당나라 시대의 양귀비를 4대 미녀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의 미인은 서시라고 합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녀라는 평가를 받는 서시에 대한 전설과 역사에 얽힌 이야기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서시는 춘추 시대 월나라 출신으로 태어난 시기는 월왕 윤상 시대로 추측되는데, 당시 역사적 상황은 오왕 합려가 초나라에서 망명 온 오자서와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무를 등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이겨 수도까지 점령했지만 이 틈을 노려 월왕 윤상이 오나라를 공격한 적이 있어서 오나라는 윤상이 죽은 후에 월나라를 공격했는데, 합려는 월왕 구천과 싸우다 화살에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죽었기 때문에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는 오자서의 도움으로 왕이 된 후에 월나라와 싸워 크게 이겼고 구천은 신하의 예로 오왕을 섬길 것을 맹세하는 굴욕적인 외교로 간신히 월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읍니다.
 이 시기에 서시가 오왕 부차에게 보내졌는데, 서시는 월나라의 명신 범려의 계략으로 오나라에 바쳐진 스파이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일종의 미인계였지요.

 범려는 뛰어난 군사전략가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는데,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범려는 절세의 미녀 서시를 발굴하고 교육시켜 오나라 부차에 보내 스파이 역활을 하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부차는 절세의 미녀 서시에 빠져 월나라가 오나라에 위협적인 나라인 사실을 잊고 오히려 자신에게 미녀를 바친 월나라를 신뢰하여 나중에 식량까지 빌려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오나라에 간 후에 부차의 명으로 오자서가 자결한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닐 가능성이 높지요.

 오자서는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월나라에 위협적인 존재였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구천이 월나라에 돌아간 후에도 월나라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월나라 입장에서 보면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지요.

 사서에 의하면 오자서는 부차의 아버지 합려의 반란을 도와 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고 오왕 합려가 죽은 후에 합려의 삼촌 계찰의 반대로 부차의 왕위 계승이 어려워 졌을때는 목숨을 걸고 부차를 왕으로 옹립했는데, 부차가 자신을 왕으로 만든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한 것은 서시의 보이지 않는 이간책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나라의 명장 오자서가 자결한 후에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가 대군을 이끌고 나라를 비운 틈을 타서 오나라를 공격하여 오나라 태자를 죽였지만 오왕 부차가 대군을 이끌고 돌아오자 화친 조약을 맺고 퇴각하였지만 오자서가 없는 오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지요.

 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은 드디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항복한 부차를 용서해주었지만 부차는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자결하였습니다.
 서시가 이 때 자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녀가 범려와 함께 떠났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성 이태백의 시에 서시가 다시는 월나라에 돌아오지 않고 떠났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떠났다는 것은 그녀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지만 이태백의 시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것이지 전설을 바탕으로 쓴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이태백의 시를 근거로 서시가 범려와 함께 떠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오왕 부차가 죽은 후에 범려가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월왕 구천의 제의를 거절하고 월나라를 떠난 후에 이름을 바꾼 이유가 혹시 서시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드는군요.
 아무튼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 정착했고 범려의 아내는 대단한 미녀라고 알려졌는데, 그녀가 바로 서시가 아닐지요.
 만약 범려의 아내와 서시가 동일 인물이라면 이 때는 구천이 죽은 기원전 465년 전후로 그녀의 나이는 30대에서 40대 초반으로 추측되지만 서시와 사서에 나오는 범려의 아내가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럴 것이라고 추측은 할 수 있지만 범려와 같은 당대 최고의 영웅이 서시 이후에 또 다른 미녀를 아내로 맞아 들였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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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정말 사랑했던 연인 사이라도 수년 간 만나지 못하면, 사랑이 식을 수 있는데,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이라도 반세기만에 다시 만난다면, 유지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 역사 중에 40여년 만에 다시 이루어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려의 강종과 이의방의 딸인 사평왕후는 이의방이 숙청된 후 궁에서 쫒겨난 후에 무려 40여년 만에 다시 재회하였다고 합니다.
 
 고려 시대 무인의 난을 주도했던 이의방의 딸인 사평왕후는 강종과 금실이 좋았지만, 정중부에 의해서 태자비에서 쫓겨난 후 40여년 만에 강종에 의해서 왕비로 복귀했다고 합니다.
 이의방과 함께 무신 정권을 세운 정중부는 아들 정균과 함께 이의방을 제거하고 이의방에 딸인 사평왕후, 당시 태자비였던 사평왕후를 궁에서 강제로 쫒아냈지요.


 반세기만에 찾은 사랑이란 말은 이와 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닐지요.

 사서에 의하면 강종이 즉위 한 후에 최충헌에게 사평왕후의 복귀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강종의 사평왕후에 대한 사랑은 40여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만큼 깊었던 것 같네요.

 비록 40여년 간 홀로 외롭게 산 사평왕후이지만 그녀에 대한 강종의 마음은 40여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으니,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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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세출의 명장 한신은 역모죄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지만, 누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신을 비롯한 장수들의 도움으로 천하를 통일한 한고조 유방은 한신뿐만 아니라 팽월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도 숙청했기 때문에 한신이 숙청당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지요.
 다음의 이야기를 읽으면, 한신이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숙청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천하를 평정한 한왕은 한신을 초나라 왕에 봉하였습니다.

 하지만 한신이 다스렸던 초나라는 과거의 초나라를 여러 지역으로 나눈 것이였지요.
 한신이 초나라 왕이 된 후에 친구였던 종리매가 망명왔는데, 그는 항우의 맹장으로 만약 한신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면 한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은 것이였지요.

 이때, 누군가 한신이 모반했다고 밀고하였는데, 한신이 모반했다고 오해한 유방은 진평의 계략에 따라 제후들을 소집하자 한신은 소집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한신은 종리매의 목을 바치면 자신의 결백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여 종리매의 목을 들고 갔지만 유방은 그를 체포했지요.

 유방은 한신의 무죄가 밝혀졌음에도 초나라 왕의 지위를 빼았고 회음후로 봉했습니다.

 실망한 한신은 유방을 원망하여 입궐하지 않았고 유방은 한신을 철저히 감시하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때에 한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던 것이 아닐지요.

 사기의 회음후 열전에는 한신이 진희와 함께 모반을 하려다 발각이 되어 처형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다른 열전에는 진희가 처벌을 두려워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둘 중 하나는 진실이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한신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한신을 죽이기 위해서 날조한 것일 가능성이 높지요.

 한신이 철저히 감시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신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도 아니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한신의 반란을 밀고한 자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고 그가 어떤 상을 받았는지도 기록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한신의 모반에 대해서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지요.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한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후환이 두려워서 사실대로 기술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기 열전에 진희가 처벌이 두려워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했으면서도 회음후 열전에서는 한신이 진희와 모반을 공모했다고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진실을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지요.

 이 밖에도 사마천은 한신이 괴통의 말을 들어 망했다고 했는데, 이 말은 한신이 괴통의 괴변을 듣고 항복한 제를 공격하여 유방의 신임을 잃었고 결국 숙청당했다는 뜻이 아닐지요.

 한신이 처형당하기 전에 아녀자에게 속아서 죽게 되었다고 탄식하면서 죽었다는 기록 역시 한신이 모반을 계획하지 않았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한신은 연금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자신이 스스로 찾아가지 않았다면 어쩌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한신은 한나라 장군들과 병사들에게 존경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잘못없는 한신을 무턱대고 죄를 뒤집어 씌여 죽일 수는 없었겠지요.

 하지만 한신은 여태후에 속아 자기 발로 입궐했고 여태후는 한신을 즉시 처형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정황이나 사마천이 남긴 기록을 보면 아마도 한신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지요.

 한신 뿐 아니라 팽월을 비롯한 다른 많은 무장들이나 많은 왕들이 반란에 연루되어 숙청당했다는 역사적인 사실 역시 한신이 억울하게 숙청당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 주는 것이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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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삼국지연의의 50%이상은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없는 내용으로 나관중의 상상력에 의해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었다는 도원결의 이야기,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살려준 이야기, 제갈공명이 무방비 상태에서 칠현금을 연주하여 사마의가 물러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초선의 미인계, 방통의 연환계, 유비가 방통에게 자신의 말을 타게해서 방통이 화살에 맞고 죽은 이야기, 관우가 화웅의 목을 벤 이야기, 제갈공명이 조조를 속여 10만개의 화살을 얻은 이야기, 진궁이 동탁에게 쫒기던 조조를 살려준 이야기, 조조가 오해로 여백사를 죽이고 도망친 이야기,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수많은 유명한 이야기들이 사서에는 기록되지 않아 허구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사서에 나오지 않는 삼국지의 일화는 대부분 허구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진수의 삼국지를 바탕으로 쓴 것인데, 진수의 삼국지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1000년이상 늦게 태어난 나관중이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지요.
 단지 나관중의 소설이 너무나도 리얼하기 때문에 진수의 정사인 '삼국지'에 누락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소설에 나오는 수많은 흥미있는 이야기들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일들이라는 것이지요.

 진궁이 조조를 구해준 후에 조조에게 실망하여 떠났다는 이야기도 완전한 허구입니다. 
 실제로 진궁은 조조가 처음 기반을 잡을 때 결정적인 공을 세웠지만, 조조의 서주 학살에 반발하여 조조를 배신하고 여포를 섬겼습니다. 사서에 의하면, 조조가 진궁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후에 진궁의 자식들을 성심을 다해 돌봐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와같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지요.
 앞서 조조가 사도의 왕윤의 보검으로 동탁을 암살하려다가 도망쳤다는 이야기 또한 완전한 허구입니다.
 사서에 의하면 조조는 효기교위에 임명되자 도망치다가, 정장에게 잡혔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현의 공조가 현령에게 풀어줄 것을 건의하여 도망친 것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것을 보면, 현의 공조와 현령이 진궁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진궁이 조조를 도망치게 했다는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지요.

 관우가 옛정 때문에 화용도에서 조조를 놓아준 이야기도 완전한 허구입니다.
 당시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참패하기는 했지만, 전군이 몰살당한 것이 아니고 해군만 참패한 것이기 때문에 조조군은 여전히 막강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어 병력이 많지 않았던 관우가 조조를 살려보내 주었다는 이야기는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지요.
 최소한 수만의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던 조조가 1만도 되지 않는 관우의 병력에 무릎을 끓고 목숨을 구걸할 일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역사학자들조차 조조를 정통으로 본 진수가 생략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정도로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어 오늘 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고 있는 것이지요.
 
 나관중이 창조한 허구들이 문학적인 가치가 높은 이유는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들마저 사실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개연성있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시중에 나온 역사서적에도 '관우가 조조를 살려준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관우가 조조를 죽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관중의 소설이 너무나도 리얼하기 때문에 만들어 낸 착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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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어부지리로 16강에 올라갔네."
 "어부지리는 아닌데요."
 이번 월드컵 대회에 대표팀이 어부지리로 16강에 올라갔다는 말을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부지리란 말은 둘이 서로 싸우다가 제3자에게 이득을 준다는 뜻으로 비록 아르헨티나의 그리스 전 승리와 그리스의 나이지리아 전 승리가 대표팀의 16강 진출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어부지리는 아니지요.

 '어부지리'라는 말은 전국시대의 유명한 유세가 소대의 일화에서 나온 고사로 조개의 살을 먹으려는 새와 이에 대한 복수로 조개가 조개껍데기를 오므려 새의 부리를 놓아주지 않아 지나가던 어부가 새와 조개를 모두 잡았다는 우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을 '소진 장의처럼 말을 잘한다'는 말이 있는데,
소대는 소진 장의 중에 한사람이자,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의 아우로 소대의 활약은 소진에 못지 않았지요.

 전국시대에 합종책으로 유명한 유세가 소진이 죽자 그의 아우였던 소대는 형인 소진에 못지 않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일찌기 연나라와 제나라를 오가면서 명성을 떨쳤고 연나라 소왕이 앙숙인 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널리 인재를 불러들이면서 연나라를 떠났던 소대를 다시 불러 중용하였습니다.

 

 명장 악의 장군이 이끄는 연나라는 제나라에 대승하여 제나라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한 적도 있었지만, 제나라가 반격하여 빼았긴 국토의 대부분을 회복하자 연나라는 제나라와 전쟁으로 피폐해 졌고, 조나라의 혜문왕이 이 틈을 타서 연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연나라는 소대를 보내 조의 혜문왕을 설득했지요.
 이 때 소대는 어부지리라는 유명한 고사를 남기며 조의 혜문왕을 설득했습니다. 

 두 나라의 악연은 유명한 장평대전에서 시작합니다. 
 장평대전에서 조나라의 장수 조괄은 진나라의 명장 백기에게 대패하여 40만 대군이 땅에 묻히며 조나라는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이틈을 타서 연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했지만, 조나라는 명장이 많고 병사들의 전투경험이 많아 연나라는 조나라에 패했지요.
 이 때문에 조나라는 연나라에 원한을 가졌고, 연나라가 제나라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지자 이번에는 조나라가 연나라를 복수하려고 했지요. 
 이때 소대가 연나라를 위하여 어부지리의 우화로 조왕을 설득하였던 것이지요.

 조나라와 연나라가 싸우면 두나라가 피폐해져 진나라만 이득을 볼 것이라고 말하니,
결국 조왕은 군대를 거두었지요.

 
 소대는 형인 소진의 합종책을 이어 받아 제후들이 진나라와 대적하게 만들었고 진나라가 한나라와 조나라를 멸망시키려 하자 소대는 진나라 재상 범수와 진나라 대장군 백기와의 라이벌 관계를 이용하여 조나라를 구하였습니다.

 이처럼 연나라와 조나라를 말 한마디로 구한 소대의 활약은 합종책을 성공시킨 소진에 못지 않았지요.

 

 소대는 형인 소진이 죽은 후에 연나라의 왕을 찾아갔고 연나라 왕은 소대를 우대했지만 연나라 왕이 제나라의 침략으로 죽자 연나라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 왕위에 오른 연나라 소왕이 소대에게 간곡히 청하여 다시 연나라로 돌아오게 한 후에 중용하였지요.

 

 제나라의 민왕이 야심을 가지고 이웃 나라들을 공격하자 연나라 소왕은 악의를 기용하였고 악의는 제후들을 설득하여 제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제나라를 치기 위한 초, 위, 조, 한, 연 5개국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연합을 주도한 연나라가 중심이 되어 악의 장군을 상장군으로 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이겨 한때 제나라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지요.

 

 명장 악의 장군의 활약이 결정적이었겠지만 진을 제외한 5개국 연합군이 결성될 수 있도록 제후들을 설득시킨 것은 소대였습니다.

 이 후에 연나라가 명장 악의를 파면한 후에 제나라에 크게 패하면서 어려움에 빠진 틈을 타서 조나라가 연을 치려 하자 소대는 조나라 혜문왕을 찾아가 어부지리라는 유명한 고사를 남기며 설득합니다.

 연나라와 조나라가 싸우면 이 틈을 타서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진나라뿐이라고 설득하였지요.

 

 진나라의 명장 백기가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장평에서 전멸시키고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하자 조나라에서는 소대를 시켜 진나라 소왕의 신임을 받았던 재상 범수를 설득시켰습니다.

 소대는 범수에게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키면 소왕은 천자가 될 것이고 백기가 일등공신이 되면 백기보다 낮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니 차라리 조에게 땅을 할양케 하고 철군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범수는 소왕에게 비록 장평의 싸움에서 크게 이겼지만 병사들이 크게 지쳤으니 땅을 할양받고 병사들을 철수시켜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소왕은 이에 동의하여 백기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백기는 범수를 원망하여 둘의 사이는 아주 나빠졌지요.

 

 이 때문에 백기는 병을 빙자하여 전투에 나가지 않았고 범수는 이러한 백기를 모함하여 소왕은 결국 명장 백기에게 자결할 것을 명령합니다.

 진나라가 계속되는 조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하자 진의 소왕은 백기를 죽인 것을 크게 후회하였고 범수는 소왕이 백기의 자결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물을 것을 두려워하여 재상의 자리를 물러났습니다.

 

 소대의 활약으로 조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을 뿐 아니라 진나라의 명장 백기를 자결하게 만들고 재상 범수까지 물러나게 만들었으니 일석삼조였지요.

 소진의 합종책이 장의에 의해 깨어진 것에 비해서 소대는 연나라와 제후들이 연합하여 제나라를 치도록 설득하는데 크게 공헌했고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어부지리라는 유명한 고사로 조나라를 설득시켰고 조나라가 진나라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는 진나라의 재상 범수와 대장군 백기의 라이벌 관계를 이용하여 진나라가 철수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훗날 제후들을 설득하여 일시적으로 합종책을 다시 성공시키기도 하지요.
 
비록 소대의 명성이 형인 소진에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활약은 소진에 못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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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왕별희는 패왕이었던 항우과 그의 후궁이었던 우희의 이별이란 의미라고 합니다.

 20세기 초에 초연된 이 연극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요.

 
항우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용장으로 최근들어 화제가 된 사자성어 파부침주의 고사를 만들며 진나라의 대군을 대파한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배를 가라앉히고 나서 솥을 깨뜨린 후에 죽음이 아닌 승리라는 전술로 7대 1에 가까운 병력의 차이를 극복하고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지요.
 하지만 항우의 적수인 한고조 유방은 불세출의 명장 한신을 얻어 항우를 해하에서 대파하고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항우는 명장 한신이 이끄는 한나라 대군에 대패한 후에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소리가 들려오자 우희에게 자신을 떠나 유방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당시처럼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던 시대에 항우와 같은 남자는 정말 가뭄에 콩나듯이 드물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항우를 사랑했던 우희는 이별대신 죽음을 선택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마도 우희가 자결한 것은 항우의 탈출을 돕기위한 희생적인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한나라군에 포위되었던 항우로써는 우희가 탈출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 한나라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였지요.
 결국 우희는 항우를 살리기 위해서 자결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사랑하던 여인이 눈 앞에서 죽는 것을 본 항우는 이미 삶의 목표를 상실한 듯 했습니다.
 당시 오강에는 배가 하나뿐이였기 때문에 항우는 오강만 건너면 고향에 안전하게 갈 수 있었고, 세상에는 아직 항우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서 권토중래 할 수도 있었지만, 항우는 고향의 젊은이 8000여명을 전쟁 중에 죽게 만들어 그들의 부모를 볼 낯이 없다며 고향으로 도망칠 것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내가 고향에서 봉기하여 데리고 나온 8000여 명의 젊은이 중 대부분이 이미 죽었다. 무슨 낯으로 그들의 부모를 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나를 용서하더라도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네." 
 항우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고 평가받는 한신조차도 정면승부를 꺼릴 정도의 천하의 용장이였습니다.

 팽성의 전투에서 불과 3만의 병력으로 한나라의 56만 대군을 격파한 일은 중국 전쟁사상 최고의 승리라는 평가지요.

 아무리 한신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고 해도 항우의 병사들을 이끄는 카리스마에 적군을 압도하는 용맹과 무용은 한신조차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항우가 배를 타고 탈출했다면 천하를 유방이 차치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지요. 
 
 항우와 우희 슬픈 이별 이야기는 2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항우가 자결했을 때의 나이는 겨우 30살, 이러한 영웅이 겨우 30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과 절세의 미녀였던 우희의 비극적인 최후로 끝나는 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어찌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을 수 있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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