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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36화 조정우 역사소설 수정판

labyrint 2011. 4. 29. 10:30

 

 

 

 근초고왕 36화


 근초고왕 35화에서 342년 연과 고구려의 전투신이 너무 길어 전투신을 35화로 하고 35,6화에서 구부가 태후와 왕후의 귀환 문제로 연에 사신으로 가는 내용을
36화로 수정하였습니다.



 고구려군의 패전은 3년전 연의 침입 때 잡혀간 태후와 왕후를 모셔오려던 사유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사유는 고무가 패잔병을 수습하여 돌아오자 처소로 불러 호되게 꾸짖었다.

 "그토록 매복을 조심하라 일렀거늘, 어찌 매복에 당하였단 말이냐? 내 너를 믿었건만, 참으로 답답하구나!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어마마마와 왕후를 모셔오겠느냐?"

 고무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소제, 패전의 책임을 지고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나이다. 소제를 처벌하여 주소서."

 사유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내 아우일 뿐만 아니라 지난 번 나라의 환란 때 큰 공을 세웠거늘 어찌 벌할 수 있겠느냐? 그만 물러가거라."

 고무는 사유에게 인사를 올린 후 물러갔다. 사유는 태후와 왕후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때 처소의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태자 저하께서 납시셨나이다."

 사유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친 후 말했다.

 "들라 이르거라."

 사유의 처소에 들어온 구부는 인사를 올린 후 말했다.

 "소자, 아바마마께 아뢸 말씀이 있나이다."

 "말해보거라."

 구부는 잠시 머믓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소자를 연에 보내 주시옵소서. 소자, 모용황에게 태후마마와 어마마마를 방면하여 줄 것을 간곡히 청하겠나이다."

 "모용황은 도리를 모르는 무도한 자거늘, 네가 간청한다고 태후마마와 왕후를 순순히 보내주겠느냐?"

 "만약 모용황이 소자의 청을 거절한다면, 소자, 태후마마와 어마마마를 대신하여 볼모가 되겠나이다. 소자가 태후마마와 어마마마를 대신하여 볼모가 된다면, 모용황도 거절할 명분이 없지 아니하겠나이까?"

 사유는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모용황이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면, 구부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허나, 어마마마께서 이를 아시게 된다면 경을 치실 터이니,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구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간곡히 청했다.

 "아바마마,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사유는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지켰다. 자신의 잘못으로 연에 사로잡혀간 어머니를 생각하면 허락하고 싶었지만, 구부가 연에 볼모로 간다면 생전에 다시는 못 볼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유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네가 연에 볼모로 간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느냐?"

 "태후마마와 어마마마를 모셔올 수 있다면, 소자,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다 하여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사유는 구부의 지극한 효성에 가슴이 뭉클해져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들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싶었지만, 목이 매여 입이 열리지 않았다. 사유는 구부의 손을 잡았다. 구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사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죽는다면 모용황이 구부를 볼모로 잡을 명분이 없을 것이다. 다만 이승에서는 구부를 다시 보기 힘들터이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구나!'

 '아니다. 국력을 키워 모용황을 굴복시킨다면, 구부를 돌려보내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사유는 한참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구부야, 정녕 그것이 너의 뜻이라면, 윤허하겠노라."

 구부는 몹시 기뻐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소자의 청을 들어주시니,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소자, 기필코 태후마마와 어마마마를 모셔오겠나이다."

 사유의 윤허를 받아낸 구부는 연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연으로 떠날 채비가 끝나자, 숙부인 고무를 찾아가 하직인사를 올렸다.

 "숙부님, 아바마마를 잘 보필하소서."

 "태자 저하의 기대를 져버리지 아니하겠나이다. 부디, 돌아오실 때까지 강녕하소서."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구부는 동생 이련을 불렀다.

 "이련아,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네가 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리기 바란다. 강한 왕이 되어 다시는 나라가 오랑케에게 치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느니라. 약조할 수 있겠느냐?"

 이련은 눈물을 글썽인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제가 형님을 두고 왕위에 오를 수 있겠나이까? 만약 모용황이 형님을 보내지 아니한다면, 이 아우가 볼모가 되어 형님을 모셔오겠나이다."

 구부는 이련의 말에 가슴에 뭉클해졌다.

 "나를 생각하는 너의 마음, 참으로 갸륵하구나!"

 숙부 고무와 동생 이련에게 작별인사를 한 구부는 사유의 처소로 갔다.

 "아바마마, 소자가 돌아올 때까지 부디, 옥체 강녕하소서."

 사유는 아들을 생전에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사유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구부야, 부디, 몸 건강히 잘 지내거라. 내,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너를 데려올 것이다."

 "아바마마, 비록 모용황이 무도한 자라 하나, 도리를 전혀 모르는 자가 아니니, 때가 된다면 소자를 돌려 보내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심려치 마소서."

 "구부야......."

 사유는 목이 매여 말을 잇지 못했다. 구부는 하직인사를 올린 후 처소를 떠났다. 구부가 떠나자, 사유는 눈물을 흘리며 크게 탄식했다.

 "구부야, 모든 것이 이 못난 아비의 탓이로구나! 아불화도의 계책을 따르지 아니한 것이 천추의 한이로다! 아불화도여, 그대가 그립구나!"

 

 한편 연나라의 도성 용성의 황궁에 당도한 구부는 연왕 모용황을 알현하였다.

 "고구려의 태자 구부, 대연(大燕)의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모용황은 구부를 보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구부 세자,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그간 무탈하게 지내었는고?"

 구부는 5년전 용성에 사신으로 와서 모용황을 알현했었다. 그 당시 겨우 13살이었던 구부는 어느덧 늠름한 청년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구부는 긴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소신의 조모와 모친께서 이곳에 잡혀 계신데, 어찌 무탈히 지낼 수 있겠나이까? 소신이 온 것은 소신의 조모이신 태후마마와 모친이신 왕후마마의 귀환을 청하고자 함이나이다. 고구려는 세세토록 대연을 섬길 터이니, 부디,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모용황은 태후와 왕후를 돌려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무어라 핑계를 댈지 생각하느라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짐이 고구려의 태후와 왕후를 볼모로 잡고 있는 연유는 연과 고구려 양국의 평화를 위해서일세. 오래전부터 고구려는 천신의 후손인 우리 선비족을 오랑케라 핍박하여 짐은 하늘을 대신하여 고구려를 응징했거늘, 고구려인들은 아직도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짐을 불구대천 원수로 여기고 있으니, 어찌 태후와 왕후를 송환시켜 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해이옵니다. 고구려의 태왕께서 이미 폐하를 주군으로 섬기고 계시온데, 어찌 고구려의 백성들이 폐하께 불온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나이까?"

 모용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구려의 태후와 왕후를 볼모로 잡고 있는 것은 양국의 평화를 위해 불가피한 일임을 그대는 정녕 모르는가? 짐의 뜻은 확고하니, 그리 알라."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소신을 볼모로 하고, 태후마마와 왕후마마를 귀환시켜 주시기를 청하나이다. 소신의 청을 들어주시면, 태산같은 폐하의 은혜,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결코 잊지 아니하겠사오니,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구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애절하여 모용황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지만, 모용황은 현숙하고 아름다운 주왕후를 보내줄 마음이 없었다.

 '주왕후는 효성이 지극하여 태후를 남겨 두고 혼자 떠나지는 아니할 것이다. 태후는 나이가 많아 언제 죽을 지 모르니, 구부를 볼모로 잡고, 태후만 보내주는게 좋을 듯 싶구나.'

 모용황은 선심쓰듯이 말했다.

 "그대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그대를 볼모로 두고, 태후와 왕후 중 한 사람을 송환시켜 줄 수는 있네. 그리 하겠는가?"

 구부는 곰곰히 생각했다.

 '어마마마께서 어찌 태후마마를 두고 떠나실 수 있겠는가? 모용황, 참으로 교활하기 짝이 없구나! 허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자는 모용황이니 어쩌겠는가? 그리하는 수 밖에. 할마마마께서 돌아가신다면, 아바마마께서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실 것이다.'

 구부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하여 주신다면, 폐하의 은혜, 결코 잊지 아니하겠나이다."

 

 모용황은 고구려 주왕후의 처소를 찾아갔다. 주왕후는 모용황을 보자,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폐하께서 어인 일이시나이까?"

 주왕후는 지극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고결한 성품을 지닌 여인으로 모용황은 그녀에게 연정을 품고 있어 고구려로 송환시켜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녀가 절개있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자신의 감정을 차마 말할 수 없었지만, 가끔이라도 이런 저런 핑계로 그녀를 만나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대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러 왔노라."

 주왕후는 혹시나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한가닥의 희망을 품고 물었다.

 "좋은 소식이라하심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나이까?"

 "그대의 아들, 구부가 짐을 찾아왔소. 자신을 볼모로 잡고, 주태후와 그대를 보내달라 하더이다. 하여 주태후와 그대 중 한명을 보내줄 생각이오.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주왕후는 구부의 효성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친 후 말했다.

 "폐하께서 태후마마와 신첩 모두 보내주신다 하여도 태후마마께서는 윤허하지 아니할 것이옵니다. 신첩 또한 태후마마의 뜻을 따를 것이나이다."

 "그대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구려."

 주왕후는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 신첩에게 청이 하나 있나이다."

 "무엇이오?"

 "부디, 태자를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태후마마께서도 태자를 보고 싶어하실 터이니, 태후마마와 신첩이 태자를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용황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태후와 구부 태자를 곧 이리로 부리리다."

 주왕후는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폐하의 하해같은 성은, 망극하나이다."

 모용황은 이내 처소를 떠났다. 잠시 후 주태후가 시녀와 함께 처소로 들어왔다.

 "구부가 왔다는 말이 사실이냐?"

 "그러하옵니다. 태자가 우리를 대신하여 볼모로 남겠다 대왕께 청하였다 하나이다."

 주태후는 몹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될 말이다. 어찌 왕위를 이을 태자가 타국에 볼모로 잡힐 수 있단 말이냐? 절대 윤허할 수 없다. 대왕께서는 무어라 말씀하시더냐? 너는 무어라 하였느냐?"

 "태후께서 윤허하지 아니할 것이라 말씀드렸나이다."

 "잘했다. 그래, 그래야지. 어찌 왕위를 이을 태자를 볼모로 있게 할 수 있겠느냐?"

 얼마 후 모용황의 시종이 구부를 데려왔다. 구부는 주왕후와 주태후를 보자 눈물을 쏟으며 큰 절을 했다.

 "태후마마, 어마마마, 소자가 왔나이다."

 태후는 나무라듯이 말했다.

 "태자가 어찌 여기에 온 것이냐? 듣자하니, 네가 우리를 대신하여 볼모로 남겠다 하였다더구나. 그게 될 법한 소리냐? 나라의 사직이 너에게 달린 것을 정녕 모르느냐?"

 "태후마마께 근심을 끼쳐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소자는 때가 되면, 고구려로 돌아갈 수 있을 터이니, 할마마마와 어마마마를 고구려로 모셔가기를 원하나이다. 바라옵건데,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절대 아니될 말이다. 나와 왕후는 결코 너를 볼모로 남겨두고, 돌아가지는 아니할 것이다."

 구부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하오나...... 아바마마께서 할마마마와 어마마마를 생각하시며 슬퍼하시고 계시온데, 어찌 자식된 도리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나이까?"

 태후는 구부의 지극한 효성에 말할 수 없이 기뻤지만, 노한 척하며 꾸짖었다.

 "어허, 아직도 이 할미의 말을 못 알아 듣는고?"

 옆에서 주태후와 구부의 말을 듣고 있던 주왕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주왕후는 장성한 아들의 지극한 효성을 보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주왕후는 눈물을 옷고름으로 닦은 후 애틋한 눈빛으로 구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구부야, 태후마마의 뜻에 따르거라. 너는 언젠가는 나라의 지존이 될 몸이거늘, 어찌 타국의 볼모로 있을 수 있겠느냐? 네가 정말 이 어미와 태후마마를 생각한다면, 위로는 폐하를 잘 보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잘 보살펴 만인의 존경받는 태자가 되거라. 또한 때가 되어 제위에 오른다면, 역사에 남는 성군이 되어 나라를 빛내거라. 그리만 된다면, 이 어미는 여한이 없을 것이다. 알겠느냐?"

 구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어마마마의 말씀, 소자, 삼가 명심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