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 34화 조정우 역사소설 수정판
근초고왕 34화
쏟아지는 쇠뇌를 뚫고 나간 고구려군이 앞길을 가로막은 부여군과 맞부디치려는 순간, 부여군의 진영에서 천지를 개벽할 듯한 함성소리가 났다. 부여구가 나타난 것이다.
고구려군은 부여구를 보자 소스라칠 정도로 놀라 멈칫거리며 서로 눈치만 보았다. 고무는 부여구의 계략에 속았음을 깨달았지만, 뒤에는 목라근자가 버티고 있어 물러날 수도 없었다. 고무는 우뢰같은 소리로 외쳤다.
"적진을 뚫고 나가라!"
부여구는 검을 치켜 들며 외쳤다.
"돌격하라!"
부여구의 명이 떨어지자, 사방에서 부여군이 쏟아져 나와 맹렬한 기세로 고구려군을 덮쳤다. 부여군의 맹렬한 공격에 고구려군의 전열이 힘없이 무너졌다. 부여구는 수백기를 이끌고 고구려군을 향해 돌진했다. 순식간에 수십명의 고구려군이 부여구의 검을 맞고 쓰러졌다. 부여구가 이끄는 부여군의 기습에 고구려군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목라근자가 이끄는 부여군이 고구려군의 후위를 들이쳤다. 앞으로는 부여구, 뒤로는 목라근자, 앞뒤로 협공을 당한 고구려군은 싸울 투지를 잃어 투항하거나 달아나는 자가 속출했다. 여노는 전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고무에게 말했다.
"대장군, 상황이 위급하니 속히 물러나소서! 여기는 소장이 목숨을 걸고 막겠나이다."
고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거늘, 어찌 내가 전장을 떠날 수 있겠느냐? 전서구(전령을 전하도록 훈련받은 비둘기)는 띠웠느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급히 추격하느라 전서구를 데려오지 못하였나이다."
고무는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허면, 속히 주현 장군에게 아군을 구원하라는 전령을 보내거라."
"대장군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여노는 아불연에게 명했다.
"그대에게 척후병 10기를 줄터이니, 퇴로를 뚫고 나가 주현 장군께 대장군의 전령을 전하게. 할 수 있겠는가?"
"소장,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겠나이다."
아불연은 척후병 10기를 이끌고 숲속으로 들어가 본진으로 가는 길을 찾았지만, 부여군이 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불연은 척후병 10기와 함께 말을 몰아 돌진했다. 치열한 싸움 끝에 척후병들은 모두 죽거나 사로잡히고 아불연 혼자서 수십명의 부여군을 베고 뚫고 나갔다. 본진에 도착한 아불연은 주현에게 고무의 전령을 전했다. 주현은 즉시 전군을 이끌고 진지를 떠났다.
한편 미주류는 2천기를 산길에 매복시킨 후 주현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쇠뇌수 대장 사기가 미주류에게 말했다.
"그대가 쇠뇌수를 지켜야 이번 전투를 이길 수 있소. 아시겠소?"
"내, 병사들과 함께 육력을 다해 쇠뇌수를 지킬 터이니, 걱정 마시구려."
미주류와 병사들이 숨을 죽인 채 고구려군을 기다리고 있을 때 척후병이 도착했다.
"1만 쯤 되는 고구려군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사옵니다."
미주류는 붉은 깃발을 올려 병사들에게 전투 태세를 갖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부여군은 전투 태세를 갖춘 후 숨을 죽인 채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주현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매복 장소에 이르자 미주류는 붉은 깃발을 높이 치켜 들었다. 부여군은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사방에서 화살과 쇠뇌가 쏟아졌다. 순식간에 수백의 고구려군이 쇠뇌나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주현은 검을 높이 치켜 들며 외쳤다.
"매복이다! 방패를 세워 돌격하여 매복을 뚫거 나가라."
고구려군은 방패를 세워 돌격했지만, 매복해있던 부여군이 쏟아져 나오며 길을 가로 막았다. 쇠노를 앞세운 부여군의 기세가 자못 대단하여 부여군보다 다섯배나 많은 고구려군이 오히려 밀렸다. 주현은 쇠뇌의 사정 거리 밖인 3백보를 후퇴할 것을 명했다.
"3백보 후퇴하라!"
주현의 명이 떨어지자 고구려군은 3백보 후퇴했다. 고구려군이 길을 가로 막은 부여군과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을 때, 요서성의 동태를 살피는 임무를 맡은 척후병이 도착하여 주현에게 보고했다.
"장군, 지금 요서성의 성주 사백이 수천기를 이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사옵니다."
주현은 몹시 놀라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뭣이? 사백이 수천기를 이끌고 오고 있다고?"
주현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불연에게 말했다.
"양쪽에서 부여군에 협공당하면 위험에 빠질 터이니, 즉시 퇴각해야겠네. 내 그대에게 2천기를 줄터이니, 대장군을 구하게. 나는 산 밑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그리로 대장군을 모셔오게."
아불연은 2천기를 이끌고 본진으로 올 때 왔던 길로 진군했다. 아불연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길목을 지키고 있던 부여군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뚫고 나갔다. 도착하여 보니, 고구려군이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아불연은 병사들과 함께 부여구가 이끄는 부여군을 향해 돌격했다. 갑자기 나타난 고구려군의 돌격에 부여군이 멈칫하는 사이, 고무는 병력을 수습하여 퇴로를 뚫고 나갔다.
고무는 주현이 이끄는 고구려군과 합류한 후 병력을 확인했다. 13000명도 안되었다. 고무는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탄식했다.
"정병 2만으로 1만도 못되는 부여군에 이토록 무참하게 참패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폐하를 뵐 수 있겠는가?"
고무는 패잔병을 수습하여 고구려로 퇴각했다.
고구려군이 퇴각하자, 부여구는 장수들을 소집하여 전황을 보고받았다. 미주류는 몹시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고구려군의 사망자는 5천이 넘을 듯 하옵고, 투항한 자는 1천이 넘사옵니다. 노획한 말은 2천 마리는 족히 넘을 것으로 보이옵니다. 반면에 아군의 손실은 수백명에 불과하다 하옵니다. 아군의 완벽한 승리이옵니다."
부여구는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연군의 동태는 어떠하다더냐?"
"연군은 이미 국경을 넘어갔다 하옵니다."
부여구는 전쟁터에 죽어 있는 부여군과 고구려군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부여와 고구려 모두 동명왕의 후손이거늘, 어찌 서로가 피를 흘리며 이토록 처절하게 싸워야 한단 말인가?'
부여구가 부상자들을 살펴보고 있을 때 요서성의 성주 사백이 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찾아왔다.
"요서성 성주 사백, 대장군께 인사 올리나이다."
"수고가 많았소. 그대가 그동안 버틴 덕분에 아군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으니, 그대의 공이 실로 크오."
"대장군께서 소장의 작은 공을 크게 치하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이때 사사노궤가 말을 몰아 다가와 말에서 내린 후 부여구에게 인사를 올렸다.
"호위대장 사사노궤, 대장군께 보고 드릴께 있나이다."
"보고 하거라."
"공주마마께서 응원군을 이끌고 당도하셔 이곳으로 오시고 계시나이다."
부여구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공주께서 친히 응원군을 이끌고 오셨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공주마마께서는 용병술에 능하셔 나라가 위급할 때면 친히 장군이 되어 전장에 나서시곤 하옵니다."
부여구는 사사노궤의 설명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헌데, 사사노궤, 오늘 참으로 용맹하게 잘 싸웠다. 내 폐하께 너의 공을 크게 치하할 것이다."
"대장군께서 소장의 작은 공을 폐하께 크게 치하해 주시겠다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사백은 사사노궤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장의 아들이옵니다."
"참으로 용맹스러운 아들을 두었구려."
"소장의 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 부족한 점이 많사오니, 아무쪼록 대장군께서 지도해주시기 부탁드리옵니다."
사사노궤는 넙죽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소장, 부족한 점이 많사오니, 앞으로 많은 지도 부탁드리겠사옵니다."
잠시 후, 갑옷을 입은 여혜가 홀로 말을 몰고 나타났다.
"어찌 공주께서 친히 여기까지 오신 것이오?"
"귀족들의 자제들이 평민 출신의 장수들의 명에 불복종한다 하여 첩이 대장이 되어 왔나이다. 너무 늦게 당도하여 송구하나이다."
여현왕은 평민이라도 재능이 있으면 장군으로 중용하였는데, 귀족들의 자제들이 평민 출신 장수들의 명에 불복종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여혜가 대장이 되어 온 것이다. 부여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치 아니한 말이오. 그대는 천하의 둘도 없는 여장부이니, 고구려군이 그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겁을 먹어 퇴각한 것인지 누가 알겠소?"
여혜는 부여구의 농에 입을 가리고 살며시 웃었다. 여혜가 웃는 모습은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웠다. 부여구는 여혜의 웃는 모습을 보자, 백제의 태자 시절에 해연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곤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태자비가 어찌 지내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여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근심 거리라도 있나이까?"
부여구는 뭐라고 말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오. 이번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생각하니......"
여혜는 긴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비록 아군이 대승하였다 하나, 전사한 병사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하기 그지 없나이다."
여혜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부여구는 공연한 말로 여혜의 마음을 아프게 하여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부여구는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아군이 대승하였으니, 전투에 참가한 모든 병사들을 도성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는 것이 어떻겠소?"
"참으로 좋은 생각이옵니다."
부여구는 여혜와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부여성으로 돌아왔다. 부여성의 백성들은 부여구와 여혜를 보자 만세를 외치며 열렬히 환호했다.
"천자 폐하 만세! 공주마마 만세! 부여 만세!"
여현왕은 부여구의 뜻대로 전투에서 이긴 장수들과 병사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2만에 이르는 병사들이 술을 마시니 도성에 있는 술이 모두 동이 날 지경이었지만, 백성들은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용맹스럽게 싸워 연군과 고구려군을 격파한 장수들과 병사들이 자랑스러울 뿐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장수들과 병사들이 한 마음으로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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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글 : 배달민족 치우천황 22화 (신재하 작가의 역사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