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파부침주의 고사를 남긴 불세출의 영웅 항우

labyrint 2010. 6. 22. 11:00


 "파부침주의 각오로 싸우겠다." 

 얼마전에 허정무 감독이 파부침주의 각오로 싸우겠다고 말해 파부침주라는 고사가 유명해졌습니다.

 파부침주란 초나라의 항우가 진나라와 거록에서 싸우기 전에 배를 가라앉히고 솥을 깨뜨린 후에 진나라를 공격하여 이긴 고사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항우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항우가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파부침주의 고사를 살펴보겠습니다.

 항우는 파부침주의 고사를 만든 거록대전에서 불과 3만 병력으로 진나라의 20만 대군과 싸워 이겼는데, 당시 진나라의 장수는 명장 장한으로 명장을 상대로 7 대 일에 가까운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이겼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승리였습니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항우가 승리한 요인으로 초나라 병사들의 일당십의 용맹과 선봉에 선 경포 장군의 용맹을 꼽았는데, 무엇보다 초나라 병사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준 항우의 카리스마적인 리더쉽이 결정적인 승리의 요인이었습니다.
 불과 25살이었던 항우는
 병사들과 같은 짐을 들고 함께 행군하면서 배고픈 병사에게 자신의 먹을 것을 주고, 추위를 떠는 병사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아픈 병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자상한 행동으로 병사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항우는 대장군 송의가 진군과 싸울 생각을 하지 않자 송의의 목을 베고 지휘권을 빼았을 수 있었지요. 그 후에 초왕에 의해서 대장군으로 임명된 항우는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넌 후에 배를 가라앉혀 병사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만든 후에 솥을 때려 부수고 3일분의 식량만 배급하여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초나라 병사들은 도망쳐도 돌아갈 배도 없었고, 식량도 없어 '필사즉생, 필생즉사'(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의 정신으로 용맹하게 싸워 이길 수 있었지요.

 
 
항우가 불과 수만의 병력으로 명장 장한의 20만 대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의 강점인 용맹함으로 적군의 약점이었던 용도를 끊었기 때문입니다.
 
용도는 식량이나 물자를 보급하는 보급로로 용도가 끊긴 진군은 필사적으로 용도를 되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연전연패하였고 승세를 타고 공격해온 초나라에 패하여 결국 퇴각하였지요.
 항우가 이끄는 초군은 9전 전승을 거두었고, 9전 전패를 기록한 진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초나라는 정도에서 진장 잔한에게 참패하여 항우의 숙부인 항량이 전사하고 주력부대가 괴멸되는 등 멸망의 위기에 빠졌지만, 항우는 거록에서 수만의 병력으로 진나라의 명장 장한의 20만 대군을 격파하여 패망의 위기에 있던 초나라를 구하고 결국 진나라는 초나라의 다른 장수 유방(훗날 고조)에게 항복하여 멸망하였습니다.


 항우는 초나라의 전설적인 명장 항연의 손자로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명성을 얻었고 겨우 23살의 나이에 숙부인 항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항량이 진나라의 명장 장한에게 참패하여 초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항우는 겨우 수 만의 병력을 이끌고 명장 장한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격파하여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지요.

 거록에서 진군을 이끈
장한은 진나라 말기의 뛰어난 명장인데, 항우와 유방과 한신이 모두 장한을 명장이라고 말한 기록이나, 그가 연전연승 중이었던 항량을 대파하여 전사시킨 것과 항우가 이끌었던 40만 대군을 20만의 병력으로 대등한 싸움을 한 것이나, 파죽지세로 진나라 수도까지 진격했던 진승의 난을 쉽게 진압했다는 기록을 보면 정말 대단한 명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신의 주군이었던 한고조 유방은 팽월의 맹활약이 없었다면 한신이 항우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는 팽월의 부장 난포의 의견에 동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항우와 한신에 대해서 한고조 유방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지요.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항우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한신보다 더 뛰어난 명장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쩌면 한신은 로마의 스피키오 장군이 군사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카르타고의 한니발을 대파하였지만 승리에도 불구하고 하니발이 더 위대한 명장으로 평가받는 것처럼 두 배 이상 많은 병력으로 항우를 이겼으니 이긴 한신보다 패한 항우가 더 위대한 명장이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항우는 해하의 전투에서 패함으로 그의 70전 무패라는 기록이 깨지면서 자신을 최초로 격파한 한신에게 화려했던 명성을 빼았긴 것이 아닌가 싶네요. 하지만 천재성에 있어 항우를 따를 사람은 중국 역사상 그 누구도 없을 것입니다.


 항우는 25세의 나이로 초나라 대장군이 되서 거록에서 진나라의 명장 장한의 20만 대군을 격파했고 해하에서 패하여 자결했을 때, 그의 나이가 불과 30세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항우는 미완성의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항우는 20살에 왕이 되어 33세에 죽은 서양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는 알렉산더 대왕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우가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알렉산더 대왕처럼 대제국을 세웠을지도 모르지요.

 

 해하의 전투에서 패한 항우는 불과 28명의 병사를 이끌고 관영 장군이 이끄는 5000 기병을 대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처럼 한나라의 병사들은 항우를 두려워 했기 때문에 항우가 좀 더 적극적으로 선제 공격을 했다면 승부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만약 항우가 해하의 전투에서 패한 후에 오강을 건너 고향으로 도망친 후에 재기하였다면 유방의 천하통일은 불가능하였겠지요.
 그 이유는 항우가 비록 해하에서 패하였다고 해도 초나라 백성들은 항우를 여전히 따랐고 항우의 지지 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에 항우는 재기할 수 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우는 천하의 명장이기 때문에 한신이 수 십만 대군을 동원한다고 해도 강이라는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한다면 한신도 어쩔 수 없었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항우는 고향의 8000여 명의 젊은이들을 죽게 만들어 고향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항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이야기지만 항우의 이러한 여린 마음은 그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지요.

 항우는 해하의 싸움에서 한신에게 패한 후에 한군에 쫒겨 자결하였습니다.
 항우가 한신에게 패한 것은 병력이 한신의 절반(한신 20만, 항우 10만)밖에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항우의 초나라 병사들이 오랜 전투로 지쳤는데다 사면초가라는 한신의 기가 막힌 심리전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팽성의 전투에서 불과 3만의 병력으로 한나라의 56만 대군을 격파한 일은 중국 전쟁사상 최고의 승리라는 평가지요.
 
아무리 한신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고 해도 항우의 병사들을 이끄는 카리스마에 적군을 압도하는 용맹과 무용은 한신조차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항우가 배를 타고 탈출했다면 천하를 유방이 차치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