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녀라고 하는 서시와 중국 춘추 시대 월나라의 명신 범려의 사랑 이야기는 오랫동안 전설처럼 전해지던 이야기였는데, 이태백의 시를 통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비록 정사는 아니지만 당시의 역사적인 정황을 보면 서시와 범려가 연인 사이였을 가능성과 부차가 죽은 후에 서시와 범려가 함께 월나라를 도망쳤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은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이후 범려는 치이자피, 도주공 등으로 이름을 바꾸고 다녔으며 사기에 나온 범려의 아내는 서시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요.
 
 서시는 춘추 시대 월나라 출신으로 중국 4대 미녀 중 최고의 미녀로 평가받고 있지요.
 그녀는 처녀시절에 가슴앓이를 해서 눈을 찡그렸는데, 그녀의 찡그린 모습이 몹시 아름다워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자 어느 못생긴 여자가 그녀의 표정을 따라해 마을 남자들이 도망쳤다는 서시빈목이라는 유명한 고사를 남겼지요.
 서시가 태어난 시기는 월왕 윤상 시대로 추측됩니다.
 당시 역사적 상황은 오왕 합려가 초나라에서 망명 온 오자서와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무를 등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이겨 수도까지 점령했지만 이 틈을 노려 월왕 윤상이 오나라를 공격하여 오나라는 할 수 없이 초나라와 화친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오왕 합려는 월왕 윤상이 죽은 틈을 타서 월나라를 공격하였지만 월나라는 명신 범려의 활약으로 오나라에 승리하였고 합려는 화살에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죽게 되었지요.
 합려는 죽기 전에 아들 부차에게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죽었지만, 당시 오왕 합려의 숙부인 계찰이 부차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여 부차는 왕이 되기가 힘들었지요.
 하지만 오나라의 명신 오자서가 목숨을 걸고 부차의 즉위를 도와서 부차는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부차는 가시나무 위에서 잠을 자면서 복수를 계획했지요.
 부차의 복수 계획을 들은 월왕 구천은 명신 범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나라를 공격을 했지만, 참패하여 부차의 신하가 되겠다는 굴욕적인 조약으로 항복했습니다.

 오왕 부차의 신하가 된 구천은 수 년간 오나라에서 부차를 섬겼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차의 환심을 사서 마침내 월나라에 귀국할 수 있었지요.
 범려도 구천과 함께 귀국했고 이후 수 년후에 서시가 오왕 부차에게 보내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서시는 월나라의 명신 범려의 계략으로 오나라에 바쳐진 스파이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서에 서시가 스파이였다는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시는 오랫동안 조국을 위해서 자신을 적국의 원수에게 바친 미녀 스파이의 원조처럼 여겨져 왔지요.

 범려는 뛰어난 군사전략가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는데,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범려는 절세의 미녀 서시를 발굴하고 교육시켜 오나라 부차에 보내 스파이 역활을 하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부차는 절세의 미녀 서시에 빠져 월나라가 오나라에 위협적인 나라인 사실을 잊고 오히려 자신에게 미녀를 바친 월나라를 신뢰하여 나중에 식량까지 빌려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범려가 최고의 미녀 서시를 어째서 오왕 부차에 보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지요.
 아마도 오나라의 명장 오자서와 오왕 부차를 이간시키기 위해서 보낸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자서는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월나라에 위협적인 존재였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구천이 월나라에 돌아간 후에도 월나라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월나라 입장에서 보면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지요.
 게다가 오자서는 부차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전해질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부차가 오자서의 말을 듣고 변심하여 구천을 소환한다면 월나라는 맞설힘이 없었기 때문에 서시를 보내서 월나라와 오나라의 화친을 도모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겠지요.

 최고의 미녀 서시를 선물받은 부차는 구천을 신뢰하여 오자서가 아무리 구천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해도 듣지 않았지요.
 그리고 부차는 자신을 왕으로 만든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했는데, 서시의 보이지 않는 이간책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나라의 명장 오자서가 자결한 후에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가 대군을 이끌고 나라를 비운 틈을 타서 오나라를 공격하여 오나라 태자를 죽였지만, 오왕 부차가 대군을 이끌고 돌아오자 화친 조약을 맺고 퇴각하였지요. 하지만 오자서가 없는 오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지요.

 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은 드디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항복한 부차를 용서해주었지만, 부차는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자결하였습니다.
 서시가 이 때 자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녀가 범려와 함께 떠났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성 이태백의 시에 서시가 다시는 월나라에 돌아오지 않고 떠났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떠났다는 것은 그녀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지만 이태백의 시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것이지 전설을 바탕으로 쓴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이태백의 시를 근거로 서시가 범려와 함께 떠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오왕 부차가 죽은 후에 범려가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월왕 구천의 제의를 거절하고 월나라를 떠난 것이 서시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지요.
 범려는 떠나면서 친구인 문종에게 구천의 관상이 어려움은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문종에게 구천을 떠날 것을 충고했지만 문종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지만 구천을 떠나지는 않았지요. 범려가  떠나자 화가 난 구천은 명장이자 명신인 문종을 죽여 범려가 떠난 화풀이를 했지요.

 여기서 바로 이때 범려가 서시를 데리고 떠났기 때문에 구천이 화가 나서 범려의 친구인 문종을 죽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지요.
 이 후에 범려는 이름을 치이자피, 도주공 등으로 바꾸고 한 나라에 정착하지 못하고 제나라, 도나라 등을 떠돌아 다녔는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이유도 서시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범려의 아내는 대단한 미녀라고 알려졌는데, 그녀가 바로 서시가 아닐지요.

 그럴 것이라고 추측은 할 수 있지만 범려와 같은 당대 최고의 영웅이 서시 이후에 또 다른 미녀를 아내로 맞아 들였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서시와 범려의 사랑의 도피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벌어진 수많은 정황들을 종합해 보면 서시가 오나라가 망한 후에 범려를 따라 도망쳤다는 전설은 서시가 부차가 죽은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이지요.

 서시에 대한 다른 전설도 있는데, 부차가 죽은 후에 서시가 자결했다는 전설과 나라가 망하자 화가 난 오나라 사람들이 서시를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전설 등이 있지요.
 하지만 언제나 신중하고 철저하기로 유명한 명신 범려가 서시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추측이지요.
 오히려 서시가 부차가 죽은 얼마 후에 죽었다는 전설은 범려가 구천이 서시를 포기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퍼뜨린 소문이 전설이 된 것이 아닐지요.
 중국의 전설적인 시인 이태백은 서시는 부차가 죽은 후에 범려와 함께 월나라를 떠났다는 내용의 아름다운 시를 지어 범려와 서시의 사랑의 도피행각은 역사적인 사실 여부를 떠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도피행각이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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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건강처럼 소중한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인간은 건강할 때는 건강의 소중함을 잘 모르지만, 건강을 잃고 나면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 건강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지요.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금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은 많이 잃어버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건강을 잃은 후에 건강을 되찾는다면 다행이지만, 건강을 되찾지 못한다면 후회하게 되지 않을지요.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과로하다가 건강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 건강만큼 소중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건강할 때에는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해 건강에 소흘하게 되지만 건강을 잃게 되면 건강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깨닫게 되지요.

 건강을 잃은 어느 유명한 가수는 '내가 다시 건강해 질 수 있다면 나의 모든 재산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건강할 때는 건강의 고마움을 잘 모르다가 건강을 잃은 후에서야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들어 인터넷이나 블로그 중독으로 운동을 별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건강이 소중한 줄 안다면, 머리로만 아는데 그치지 말고 운동을 하고 몸을 단련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건강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건강이 소중한 것을 알아도 건강을 유지하려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건강을 잃을 수도 있겠지요.
 건강도 투자인 것 같습니다.
 투자하지 않으면 건강하기 쉽지 않겠지요.
 블로그에 글을 쓰느라 쉬지도 않고 늦은 밤까지 글을 쓰시는 블로거님들은 제 글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labyrint

 "한국팀이 너무 맥없이 패한 것 같아요."
 한국 대표팀이 남미의 강호  아르헨티나에게 4 : 1로 참패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우세는 예측했지만, 1,2 점 차이가 아닌 3점 차이로 패한 것은 대단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큰 충격을 받았는데, 2002년 한국팀이 4강 신화를 연출한 이래 이처럼 참담한 패배는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에게 5 : 0 으로 참패당했던 악몽이 기억날 정도였습니다. 2006년 스위스 전에서 오프사이드 논란과 함께 2 : 0으로 패하기 전까지 한국팀은 2002년부터 1 점 차이 이상으로 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전에서 패한다고 해도 1점 차이로 질 것이라고 예상했었지요.
 하지만 결과는 냉정했습니다.
 4 : 1의 스코어가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경기는 초라했습니다.
 정성룡 골키퍼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5 : 1 심지어 6 : 1 로 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끝난 경기, 어쩌겠습니까?
 남은 경기라도 최선을 다해 16강 진출을 이룬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지 않을지요. 다행하게도 그리스가 나이지리아를 꺽어 한국팀의 16강 진출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나이지리아에게 비기기만 해도 16강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승세를 타는 그리스가 아르헨티나 마저 꺽는다면, 한국팀의 16강 진출은 좌절되기 때문에 반드시 나이지리아를 이겨야 될 것입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한국 대표팀이 네덜란드에 5 : 0으로 참패한 후에 유럽의 강호 벨기에와 1 : 1로 비기며 선전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정신만 차린다면 나아지리아전에서 선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16강 진출이 거의 힘들어진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지만, 문제는 16강 진출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와의 참패로 무너진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회복해야 됩니다.
 이대로 무너진다면,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질시하는 외국 네티즌들의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지요.
 이대로 물러설수는 없습니다.
 한국 대표팀 선수들은 임전무퇴의 정신과 4강 신화의 원동력이 되었단 헝그리 정신으로 나이지리아를 반드시 꺽어 원정대회 16강 진출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창출해 내기를 기대해 봅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처럼 한국팀의 참패는 1차전 승리로 들뜬 한국 대표팀에게 보약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패장인 허정무 감독도 아르헨티나전의 패전을 통해서 전술의 문제점을 되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선수는 과감히 빼고 컨디션이 좋은 선수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좋지 않을지요.
 선수의 컨디션을 알아보는 것도 감독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르헨티나 전에서 드러났던 문제점을 반성하며 나이지리아전에 배수진을 쳐서 승리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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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abyrint